우리시대의 美術人

〔화가의 산책로|광릉∼봉선사〕서양화가 김성혜(KIM SUNG HYE)③ 성(聖)과 속(俗) 그 경계에서 (김성혜, 화가 김성혜, 김성혜 작가)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5. 6. 6. 20:26

 

 

 

 

봄꽃이 어느 한 날 한마디 말도 없이 저 혼자진다. 비바람이 불지 않아도 봄날의 꽃은 너무도 빨리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것이 봄꽃의 운명이런가. 나무 우거진 푸른 숲에 에워싸여 어느 한 시대의 비애감을 묵묵히 가슴에 안고 조용히 제자리에 있는 재실(齋室) 앞을 걷는다. 오래전, 얼마나 많은 사연의 걸음들이 이 길을 오갔을까.

 

어느 날 문득 텅 빈 광장에서 홀로 서 있는 를 발견했을 때, 가슴 지려오는 아픔처럼 길 옆 나무그루에 매달린 겨우 몇 꽃잎이여. 우수에 젖은 듯 연분홍 두견화가 왠지 모를 우수에 젖어 해맑은 얼굴로 하늘거린다.”

 

 

 

 

 

    

연두 빛 잎들을 앞 다퉈 키워낸 우람한 나무들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나뭇잎 사이 실바람에 실려 내게로 달려오는 오래된 시간의 이야기들. 하늘은 맑고 드높기만 하다. 티끌하나 없는 깨끗함엔 아픔도 스며있는 것인가. 가을날 첼로선율처럼 우수(憂愁)에 젖어드는 마음의 흐름은 또 무슨 연유이런가.

 

비스듬히 나무에 기댄다. 눈을 감으면 개울을 흐르는 물소리는 가슴 한구석 멍울을 씻어내느라 이따금 절규 같은 소리를 섞는다. 그러다 이른 아침 촬촬촬 청량한 물줄기의 변주로 희망을 건넬 것이다. 평안으로 흐르는 길의 안내자. 물에게서 위로를 받으면 외롭지 않다.”

 

 

 

 

   

 

이 우주가 만들어 내고 있는 수많은 별들을 연상해 본다. 톱니바퀴의 요철처럼 시간과 공간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서로 얽혀 쉼 없이 흘러가고 우리들은 언젠가부터 물질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착각 속에 한순간도 진정한 자유를 느껴보지 못한 채 일상에 함몰되어 간다.”

 

 

 

 

 

    

오방색의 기점으로 갖은 색의 깃털에 매료되어 혼 줄을 놓고 그린 적이 있었다. 박물관 민화에 서서히 젖어들었다. 느낌이 전해왔다. 옛 선조들의 숨소리랄까. 봉황이 꽃으로 보이면서 서서히 마음속으로 품어 들기 시작했다.

 

오래 전 세월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기류가 점점 보였다. 그래서 시작했던 일월도다. 거기엔 해와 달,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 하늘과 물과 땅 등 삼라만상이 그 안에 있어 바로 붓을 들었었다. 그날의 흥분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이끼 긴 석축에 무심히 앉았다. 왕이 머무르는 저 위 성()의 공간을 바라다보다 가 걸어 올라왔던 저 아래 속()의 길을 내려다본다. 불현 듯 를 흔드는 자아의 공명이 쿵쿵 때린다. 어디선가 클락클락 크낙새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만 같았다. 그렇다. 어쩌면 삶이란 지금 가 앉은 자리처럼 언제나 경계의 선에서 몸부림치는 것이지도 모른다.

 

내가 초록을 좋아하는 이유 속엔 어릴 적 엄마의 영향이 크다. 언제나 아침에 눈 뜨면 앞마당 갖은 꽃들을 가꾸셨다. 그리고 이곳 광릉. 가족이 가끔씩 소풍오던 곳으로 온통 초록이었다. 동생들과 능()주위를 돌며 역사이야기를 듣던 그 시절 움직임과 웃음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늘 새로운 듯 변함없이 고즈넉하여 혼자 즐겨오는 곳으로 광릉을 손꼽는다. 그러나 오늘, 오늘은 그 초록기억을 그림에 담아 어머니, 당신께 드리려합니다. 이젠 느린 걸음으로 좀 더 가깝게 사물을 사유하면서 잿빛 안개에 가려진 자유의 빛을 캔버스에 스며들게 하겠습니다!”

 

 

 출처=-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564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