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화가의 산책로’는 아틀리에서 작업에만 몰두하는 화가가 정신적 휴양처로 찾는 곳을 동행취재 한 기사이다. 자연 속에서 작업의 피로감을 풀어놓고 영감을 얻는 그곳은 작품세계에 영향을 끼친 장소라는 의미도 있다. 글의 형식은 화가의 메시지와 기자의 현지방문 소회를 묶어 전개했다. <편집자>
전날 종일토록 가랑비가 내렸다. 촉촉이 마른 대지를 스며들고 묵은 때를 벗겨내듯 부드럽게 적셨다. 그런 다음날, 연둣빛 나무이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은 맑고 깨끗하여 차라리 눈물겹도록 투명했다.
서양화가 김성혜 작가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소재, 세계유산 조선왕릉 광릉(光陵)과 천년의 전통을 간직한 유서 깊은 도량인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奉先寺)를 찾았다. 맑디맑은 빛살이 융단을 깔아놓고 안내하듯 고요하고 평온했다. 숲길 도로를 따라 야트막하게 흐르는 개울은 해맑은 소년의 얼굴처럼 맑은 바닥을 수줍게 드러내 보이며 청량하게 하느작거렸다.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하늘과 산사(山寺) 뜰에 피어난 진홍의 꽃이 재리재리한 감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쉬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솔솔바람 부니 겹의 꽃잎이 하늘거렸다. 홀로 앉아 시름 놓을 곳을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순홍(純紅)의 입술로 ‘내려놓아라’ 몇 번이나 말을 건넸다.
“작품이 완성 된 날엔 어김없이 절을 찾는다. 마음으로 그렸으니 보듬고 내려놓아야 할 것 또한 마음이다. 여기 봉선사에 오면 조용히 뜰에 앉아 그간의 작업과정을 되돌아보며 하나의 작업과정이 기나긴 질긴 업장(業障)의 해소로 여겨진다.
대웅전에 앉아 작품 구상과 내일의 계획까지 기록하며 스케치하는 참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시간들이다. 어차피 누구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외롭고 고독한 작업의 길인지라 지독한 고립감조차도 제법 즐길 줄 안다. 언젠가 이윽고 물질의 세계도 내려지고 함축된 이야기로 천진난만한 심령(心靈)의 절정이 펼쳐지기를 염원한다.”
한적한 절 뒷동산 길을 몇 걸음 옮기는데 불현 듯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역사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 한 구절이 스쳐갔다. “인정과 의리는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변한다고 낡아 질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5년 6월4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