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는 이중섭이 가장 애호했던 작품 소재 중 하나이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소를 즐겨 그렸는데, 통상적으로 조선인에게서 ‘소’는 인내와 끈기를 상징하는 민족적 상징물이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이중섭은 더욱 적극적으로 소를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을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시점에 강렬한 붉은 황소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대부분 1953~54년 통영과 진주에서 다수의 황소 및 흰 소, 연작이 그려졌는데, 이 시기는 당시 일본에 있던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미루어 볼 때, 대단한 의욕과 자신감에 차서 맹렬하게 작품 제작에 몰두할 때이다.
그의 소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기도 해서, 화가의 심리 상태와 처지가 매우 진솔하게 표현되곤 한다. 이 황소의 경우, 강렬한 붉은 색을 배경으로 세파를 견딘 주름 가득한 황소의 진중하고 묵직한 모습을 담았다. 힘차면서도 어딘지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이중섭 황소의 공통된 특징이다. 붉은 황소머리를 그린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은 총4점인데, 그중 이 황소는 1976년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발간된 금성출판사 이중섭 화집에 수록된 바 있으나, 거의 전시된 적이 없었다가 이번에 이건희컬렉션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
흰 소, 또한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이다. 붉은 배경의 황소 머리를 클로즈업한 작품과는 달리, 흰 소는 주로 전신을 드러내고 화면의 한쪽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흰색’은 백의민족인 조선인을 암시하는 색이고, ‘소’라는 동물 또한 억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고 끈기 있게 노동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어 조선인의 상징으로 읽힌다. 일제강점기에는 암암리에 금기시되었던 소재였던 만큼, 해방과 전쟁을 거친 후 이중섭은 이 소재를 더욱 당차게 적극적으로 재소환 하였다. 여러 점의 흰 소 중에서 이 작품은 다소 지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등을 심하게 구부려 고개를 푹 숙이고, 성기를 드러낸 채 매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다.
이중섭은 ‘소’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솔직한 심리 상태를 마치 일기 쓰듯 그때그때 다른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이중섭은 스스로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畫工)”이라고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다. 조선의 색채와 특색을 담아, 하루하루 정직하게 살며, 그것을 솔직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이중섭이 그리고자 했던 작품의 세계였다.<글=김인혜>
이중섭(李仲燮,1916~1956)은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보에서 각각 미국과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한 서양화가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를 통해 서양화를 접한다. 이후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문화학원 재학 때 만난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고 원산에서 살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가족들과 남하하여 제주도와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다가,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작품들을 남겼다.
전쟁 상황 속에서 열악한 경제 상황과 재료 부족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과 재료 실험을 했는데, 담배 포장지로 쓰인 은지에 새겨 그린 '은지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작업에 몰두하여 황소, 흰 소 등 그의 대표작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로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전시만 성공하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가리라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극도의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강박증, 결벽증, 거식증 등 정신적인 질환 속에서 고통을 겪다가 1956년 40세의 생을 마감했다.<글=김인혜>
◇초현실적 요소
‘가족과 첫눈’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한국전쟁 중 갑작스럽게 피란을 내려와 제주도에 정착한 이후 제작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중섭의 일가족은 여러 피란민 무리에 섞여 제주도까지 실려 왔는데, 적당히 지낼 곳이 없어 외양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후 서귀포의 한 초가집에서 정착하게 되면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제주도 피란 생활을 시작했다.
이 중 가족과 첫눈은 그가 남하한 이후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남녀노소 인간들이 그들보다 더 큰 새와 물고기 사이에서 다함께 첫눈을 맞으며 하릴없이 나뒹굴고 있다. 현실 세계의 경험과는 다른 ‘크기’에 대한 감각은 작품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인데, 실제로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인간과 동물이 어우러진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다수 그렸다.
이 작품은 197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 출품된 후 거의 전시된 적이 없다가 이번 기증을 통해 선보이게 된 작품이다.<글=김인혜>
△권동철=2월20일 2022년,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