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일본과의 공식적인 수교가 재개되기 이전인 1948년에 일본에 건너간 권진규(權鎭圭,Kwon Jinkyu,1922~1973)는 1949년에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고 1953년에 졸업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일본에서 조각을 공부한 셈이다. 졸업 후에도 연구과에 적을 두고 꾸준히 창작활동에 전념하였고 재야적 성격의 ‘니카텐’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조각가로서의 역량을 다져나갔다. 1959년에 가정 사정으로 귀국했고, 1962년에 동선동 아뜰리에를 손수 짓고 1973년 작고할 때까지 창작에 전념했다.
일본에서는 브론즈나 돌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귀국 이후에는 테라코타와 건칠 같은 전통적인 표현재료로 작품을 제작하여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1960년대는 한국미술에서 추상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상은 한국의 전통미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며 이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고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사실’은 시각적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의 상대 개념이며, 그의 작품은 구상조각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삭발한 채로 군더더기 없이 표현된 이 테라코타 ‘자소상’은 권진규가 1950년대부터 반복적으로 제작하던 자소상의 유형 중 하나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은 같은 해에 제작한 ‘지원의 얼굴’을 비롯해서 1970년 ‘가사를 입은 자소상’에 이르기까지 흉상조각에 흔히 나타나는 조형적 특징인데, 이러한 표현은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던 작가의 내면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한국 현대조각가들 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조각한 작가로는 김종영(1915~1982)과 권진규를 들 수 있는데, 한국에서 ‘사실주의’를 정립하고자 했던 권진규는 자신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면서도 외모의 닮음을 넘어 내면세계를 담아냈다는 점에 그의 독자성이 있다.<글=김이순>
◇소외와 희망, 피에로와 원숭이 대비, 손 예찬
‘코메디’, 역시 권진규가 스케치를 여러 점 남길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권진규는 견고한 조형성을 바탕으로 하여 동서양 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작품으로 담아내었다. 이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코메디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중앙의 큰 얼굴은 권진규의 가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무엇에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동자와 크게 벌린 입 모양, 진한 눈썹선의 도상은 한국의 탈, 서양 가면의 복합적인 형태이다. 탈은 본질적으로 은폐, 차단 등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외부로 향한 적극적인 발언을 표현한다는 이중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권진규는 가면이 보여주는 익명성의 개념을 이용하여 사회로부터의 소외와 사회로 향한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글=류지연>
작품‘곡마단’은 건칠로 제작된 부조 작품이다. 권진규는 서커스, 코메디 등의 주제로 작품을 여러 점을 제작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상당한 양의 스케치도 그렸다. 이 작품은 바퀴 위에 서 있는 피에로와 거꾸로 있는 흑백의 원숭이의 자세, 그리고 붉은색 의상의 피에로와 흑색이 강조된 원숭이의 대비를 통해 화면에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권진규는 건칠에 대하여 1950년대 일본 체류시기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가 건칠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구성이 강하여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재료이며 표면효과를 우연하게 만들면서 화면에 다양한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글=류지연>
‘손’은 인체에 대한 정확한 해부학에 근거하여 제작한 작품으로서 근육이 두드러진 강건한 팔과 손가락을 모은 채 펼친 손바닥, 약간 꺾은 엄지로 하늘을 향해 뻗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로뎅과 부르델의 영향을 받았으나 거장들의 작품보다 더욱더 사실적인 표현이 강조되며, 공간으로 뻗어나가는 확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힘이 넘치는 손의 이미지는 권진규가 국립묘지 현충탑 건립에 참여하면서 무명용사의 비, 손 부분을 제작하는데 있어 영웅들의 힘찬 움직임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었다. 또한 조각가 자신의 손을 모델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형태의 본질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손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다.<글=류지인>
◇앵포르멜의 영향, 전통문양에 대한 연구
‘작품 4’는 권진규가 추상경향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결과의 작품이다. 권진규는 구상에서부터 형태를 정제하듯 단순화시켜 추상으로 나아가는데 이러한 구상과 추상의 접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은 바로 부조에서이다. 이러한 부조 작품에서는 선의 리듬감, 색채의 사용, 조형을 만드는 손의 느낌 등이 작품의 표면에 그대로 살아나 있어 그가 작업을 즐기면서 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의 표면에서 발견되는 두들기고, 긁어내고, 다독이는 자유로운 손놀림에서 유희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부조 작품은 특정한 대상을 의식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자유로운 조형이 가능했던 것인데 그는 거기에 어물지 않고 본격적으로 추상경향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형의 방식을 재현과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물질 자체의 표현성을 탐구하고 격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거친 질감을 즐겨 사용하였다. 투박하고 거친 화면처리, 복잡한 선들, 형태들의 복합적인 구도를 통해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의 영향도 짐작할 수 있다.<글=류지연>
‘문’은 ‘공포’작품의 또 다른 변주이다. 1960년대 중반 건축의 지붕 및 공포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며 전통문화에 대한 권진규의 적극적인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1947년 김복진의 속리산 법주사 대불 조성에 참여한 바 있으며, 일본 유학시절부터 불상을 제작한 바 있다. 귀국 후 그는 1961년 숭례문 수리 때 제도를 담당하여 고건축이 지닌 조형성과 색감을 접하게 되는데 당시 남긴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후 ‘공포’시리즈가 제작되었다.
그가 작품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으나 스케치를 많이 남긴 것으로 보아 이 시리즈는 작가에게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그는 고대 제기, 반가사유상을 비롯한 삼국시대 불상,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조선시대 탈, 석상 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이를 현대적인 미감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실제로 그는 작품 이외에도 간간히 귀면, 탈과 같은 민속품을 만들기도 하였고, 역사를 다룬 연극과 영화의 무대세트를 진행하면서 전통문양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었다.<글=류지연>
△권동철=2월23일 2022.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