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나의그림 나의생애|화가 조향숙,①]동시성 시간의 형상화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5. 7. 14. 10:58

 

 

  

주악천인도, Woodcut 70×68, 2000. 허공을 나는 보살인 주악천인(奏樂天人)을 표현한 작품으로 목판화의 고유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한 순간도 머묾이 없이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실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며 영원성을 믿는 종교적 사유를 드러낸다.

 

 

판화라는 매체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 자아의 발견이라는 작품세계의 메시지를 꾸준히 발표해 온 중견화가 조향숙 작가의 발자취를 년대별로 정리했다. 불교의 도상(圖像)을 통한 독창적인 표현엔 의식의 흐름을 통해 잠재된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마주친 과거와 현재가 동시성을 갖는 시간으로 형상화 되고 있다. 본문의 는 필자를 지칭한다.

 

나의 고향 경북 성주는 가야(伽倻)의 산실이다. 어린 시절 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의 한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졸업여행을 해인사(海印寺)로 갔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나 역시 전날 밤 한껏 마음이 들떠 잠을 설쳤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걸어서 절을 향해 가는데 뜻밖에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아닌가.

 

대책 없이 비를 쫄딱 맞고 말았다. 나는 점점 힘이 부쳐 대열에서 뒤처지고 어는 순간 뒤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로 가야할지, 앞으로 가야할지 어디가 앞인지 구분이 안 되어 망연자실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 찾아와서 따라갔었다. 그때 처음 느꼈던 적막감은 오래도록 잘 잊어지지 않았었다.

 

그렇게 학생들이 모두 비에 젖은 그날 밤. 절 아래 홍제여관이라는 가야산의 유일한 여관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여학생과 남학생 모두 두 반 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부모 곁을 처음 떠나 여행지에서 하룻밤을 청했다. 그 때 그곳에 휴양 왔다는 어느 아주머니가 들려주던 불교에 얽힌 교훈적 이야기에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소복하게 앉아 혼을 빼앗기듯 만담(漫談)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기만 하다.

 

그 다음 날 백련암, 희랑대(希朗臺) 등을 가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성철스님이 수행(修行)하셨던 어느 쪽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높은 암자가 붙어있었는데 어린 나의 눈엔 뭔지 모르는 경건함이 배어나왔었다.

 

 

 

비천, Woodcut 60×90, 2008. 유성 잉크로 찍은 판화 작품으로 선명함을 보여주지만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주며 검은 빛깔이 단조로운 것을 알 수 있다.

 

 

개산 상봉에 눈 내리면

그 후, 수학여행의 경험이 내게는 뭔가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의적 발걸음으로 다시 해인사를 찾은 건 중학교 들어간 어는 봄날이었다. 동창생과 같이 가는 길엔 찔레꽃 향기가 진동했다. 하얀 꽃을 꺾어 친구와 좋아라하며 국일암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때부터 나는 절을 많이 찾았다.

      

나는 고향집에서 육십 리 떨어진 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학교와 우리 집 중간 즈음에 위치한 외가 집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다. 외가 집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 언니랑 매일 등하교를 하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언니는 여고생 갈래머리를 땋느라 자주 시간을 지체했는데 초등학교 6년을 개근했던 내가 중학교에서는 졸지에 지각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언니와의 추억은 아름답다. 멀리 산에 진달래 따러 올라 가기도하고 꽃을 따러 다니다 벌에 쏘이기도 하였다. 가야산(伽倻山) 산자락에 있는 나의 고향에서는 어른들이 가야산을 개산이라 불렀다. 나는 그 개산 상봉에 눈이 내리면 어릴 때부터 꿈에 젖어 바라보곤 했다.

 

나의 어릴 적 고향엔 가야시대 무덤이 있었다. 친구들과 우리는 그 무덤 안을 비가 오면 비를 피하는 아주 훌륭한 공간으로 피했고 그곳을 지나치게 되면 일부러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가 걸어 나오면서 가벼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덤엔 토기 깨진 것 등이 굴러다녔는데 도굴된 무덤 같기도 한데 어쨌든 전혀 무섭지가 않았었다.

 

그리고 그 무덤을 놀이터 삼아 놀다 저 아래 살구꽃 핀 마을의 정경은 지금도 눈앞에 선한 아름다운 서정의 풍경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자연과 절과 대가야의 문화 속에서 호흡하며 성장한 나는 그 지역 어른들의 가슴에 녹아있던 가야인의 긍지를 가슴에 새기며 성장했던 것이다.

 

 

 

천인, Woodcut 60×90, 2008. 수성 먹으로 찍은 판화 작품으로 검은 빛깔이 유성 잉크에 비해 약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며 빛깔도 다양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스승의 격려 한마디

그림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 시절엔 교장선생님도 종종 미술을 지도하였다. 그러다 2학년 때 교생 선생님이 서울의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오셨다. 그 선생님이 나를 보고 그림을 잘 그린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해 6, 당시 시골학교에서는 송충이 잡으러 산에 가기도 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 때 선생님이 양산을 씌어 나를 읍내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정말 감사했었다. 그러시던 교생 선생님이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미술선생님으로 취임해 오셨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선생님 부임 이후 나는 문학반에서 본격적으로 미술반으로 옮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우리 읍내 용암면이라는 곳에 가면 대통령상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분이 자연미 우러나는 우리나라 사실주의 풍경의 선구자인 김창락 화백이셨고 그 분 제자가 필자의 미술선생님이셨던 것이다. 나는 그런 선생님을 존경했고 따랐기에 당연히 진학목표도 선생님의 뒤를 따라 수도여자사범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세월은 유수(流水)같이 흘렀다. 필자의 첫 번째 개인전엔 중, , 대학교, 대학원 선생님들이 다 찾아주셨다. 그래서 개막식에는 삼대(三代, 김창락의 제자 이선희, 그의 제자 조향숙)가 나란히 설 수 있었다.

 

[대담정리=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312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