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달, 50×100㎝
소나무, 나비, 야생화, 산길 그리고 시간의 복작거림을 벗어난 정중동(靜中動). 고요를 파고드는 애수의 감각감정(Stimmung). 그 풍경 속을 거닐면 새순이 자라나듯 의식은 신선한 싹이 돋고 차갑게 손등을 때리는 밤공기에 쓸쓸함 묻어난다. 아하, 대지(大地)의 어머니 월광(月光)이여!
그냥 갈 것이지, 산산한 바람이 짓궂게 다시 한 바퀴를 더 휘익 돌고 지나갔다. 잡히지 않은 것이 깨뜨린 고즈넉한 정적이 휙휙 울음을 참으며 낙엽사이로 재빨리 스며들었다. 곧거나 비스듬히 띄엄띄엄 서서 제 일생의 파란을 이겨낸 눈빛승마, 구절초, 궁궁이….
서리 맞아 축 처진 이파리들 위로 피어난 미혹(迷惑)의 순백 야생화 꽃잎위에 술시(戌時)의 늦가을 밤 비올라 선율이 애잔하게 흘렀다. 해맑고 청아한 목소리, 생생한 정신이 뿜어내는 싱싱하고 맑은 향기가 좁다란 능선에 진동했다. 놀랍다. 낙엽 수북이 쌓이는 까칠한 찬 공기의 계절에 한 송이 꽃으로 주목받는 도도한 자존은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 열렬한 마음인 것인지.
푸른 밤, 53×41㎝
둥글게 달이 떠오른다. 꽃그늘에 앉은 누이는 무슨 생각에 깊이 젖었나. 교교히 흐르는 푸른 월색(月色)이 연민으로 달아오른 수줍은 볼을 훤히 비추고 말았다. 나비들이 막힘없이 날아오른다. 꽃들과 가벼운 입맞춤. 무슨 사랑스런 밀어를 들었기에 황홀히 나풀거리며 날아오르나.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면 무량(無量)한 달빛에 한가로이 노닐 수 있을까.
팍팍한 세월의 궤적을 익살로 풀어낸 구부러진 허리의 노송이 달빛아래 노니는 나비 떼를 무심히 내려다본다. 휘었으되 굽히진 않은 꼿꼿한 기품이여. 두터운 표피의 주름위로 세월의 풍상이 묻어난다. “솔잎도 처음에는 널따란 잎이었을 터. 뾰족해지고 단단해져버린 지금의 모양은 잎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은 추위가 지나갔던 자국.” <김기택 詩, 소나무>
소나무와 야생화 핀 밤의 나비, 50×100㎝ Oil on Canvas, 2012
나무가 순애보 마음을 열어놓는다. 적막한 시간에 누렇게 색 바랜 편지 한 장을 품에서 꺼내 묵묵히 들여다본다. 누군가는 가까이 머물러야 사랑이라 하지만 단 한 번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는 순정고백을 빼곡히 써내려가며 우직하게 서 있는 소나무도 있는 것이다.
가는 한줄기 바람이 지난다. 모퉁이를 돌아나가면 오솔길 저 만치 끝자락 옹기종기 키 작은 집들의 뽀송한 맨얼굴 같은 앞마당에 달빛 부서진다. 그 한가운데에서 손을 내밀면 잡힐 듯 날개를 파닥일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소망이라는 이름의 노랑나비 꿈!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2년 11월26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