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ARTIST, JUN KYUNG HO〕서양화가 전경호|눈물대신 어른거렸었던 물빛, 발길 잡는다! (색한지, 자연 그리고 존재, 전경호 작가)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5. 5. 9. 00:26

 

194.0x112.0cm 색 한지, 2011

 

 

 

길손 되어 산 밑 고향마을 들어섰네. 굽은 흙먼지 길, 암자색 자목련 꽃 그림자 졸고 있는 신시(申時). , 내 맘 깊은 곳 유년의 흑백사진에 번지는 저 황혼 빛!

 

 

빈들엔 겨우내 얼었던 논바닥이 축축이 녹아 질척거렸다. 겨울이야기들을 비망록(備忘錄)으로 기록하려는 듯 누렇게 색 바랜 벼를 벤 흔적들은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그 사이사이 흩어진 볏짚들의 이동엔 새들의 곡식알을 탐닉했던 시간이 쌓여 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풋풋한 흙냄새와 미꾸라지가 놀다간 흙탕물 냄새가 섞여 선들바람에 배회했다. 그러면 작은 도랑둑의 숫기 없는 총각처럼 듬성듬성 서 있는 키 큰 미루나무들이 깊은 호흡을 하듯 흔들거리곤 했다. 평평한 논과 냇가를 구분짓는 이 나무들의 다소 어색한 풍경의 조화는 큼직한 잎들이 자라는 비바람 치는 여름 소낙비에 아주 요긴한 피난처가 되곤 했다.

 

 

 

   

    산하-자연 그리고 존재(Nature & Existence), 194.0x112.0cm 색 한지, 2011

 

 

 

이맘쯤 집집마다 볏짚이며 풀이며 소 배설물로 검게 썩힌 두엄에선 구수한 냄새가 허연 김을 뿜으며 마을 앞 들판으로 슬금슬금 느리게 깔렸다. 그런 때면 지금은 되돌아 갈 수 없는 소년시절 드넓게만 보였던 앞들과 저 먼 산 너머 세상에 대한 동경(憧憬)도 함께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산비탈 황토밭엔 유난히 잡풀들이 잘 자랐다. 하루만 지나도 언제 그랬었냐는 듯 잊어먹는 아이처럼 막무가내였다. 언제나 콩이며 목화며 고추 모종보다 더 크게 자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황토밭은 힘겨웠던 땅만은 아니었다. 양지바른 완만한 곳에 길쭉한 사각형 모양 밭이 있었는데 해마다 감동의 물결을 넘치게 하는 결실의 선물이 그곳에 있었다.

 

고구마 밭일은 언제나 열정적으로 했다. 풀을 뽑고 흙을 북돋워주고 가뭄이면 저 아래 냇가에서 끙끙대며 물을 길렀지만 전혀 피곤한줄 몰랐으니까. 밭 옆 묘지를 감싸고 있는 나무그늘아래엔 아늑한 잔디쉼터가 있었다. 어느 땐 거기에 벌렁 누워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솔향기에 잠들어 해가 진 뒤에 내려온 적도 있었는데 그 하늘엔 가보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이,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있어서 기뻤다.

 

 

 

   

    116.7x80.3cm 색 한지, 2011

 

 

 

진정, 그런 마음 다시 만나 볼 수 없는 것인가

오늘, 불혹의 시간을 안고 나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던 사람을 만나고 산길을 내려온다. 산을 맴돌아나가는 조그만 냇가 평평한 돌. 그 위에서 먼 길 떠나던 사람 옷가지 태워 흘려보냈던 쪼그려 앉은 얼굴 위 눈물대신 어른거렸었던 물빛, 발길 잡는다.

, “삶의 끝을 정맥이 마르는 것이라 생각지 말라. 발걸음 멈출 때 마음이 앞으로 기울지 않는 것이다는 시여! <황동규 , 바다 앞의 발> 하여, 정녕 이 산하(山河)에 그런 마음 다시는 만나 볼 수 없는 것이냐.

 

 

 

 

출처=-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232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