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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⑮‥문화예술진흥법(文化藝術振興法)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9. 1. 18. 16:11


     서재에서 독서하는 이해랑


해방 이후 20여 년 동안 문화예술계에서 이해랑의 활동은 한마디로 눈부신 것이었다. 한국 현대극의 기틀을 다지는데 그의 역할은 아무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그는 국회에서 한국연극, 더 나아가 문화예술 전체를 진흥시키는 기초적 법안 제정에 앞장서는 것으로 연출 활동의 공백을 메꾸려 더욱 노력 했다.

 

이해랑을 여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영입했던 당대의 실력자 김종필은 이해랑의 소천 직후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이해랑 선생은 8대와 9대국회에서 의정(議政)활동을 하신 분이다. 3공화국에서 학계와 법조계 인사들이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예는 많지만 8대에 이해랑 선생이 국회로 진출함으로써 문화, 예술인이 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효시(嚆矢)가 된 셈이다. 의사당에서의 이 선생은 한마디로 진지하고 성의 있는 문화, 예술계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분이 문화예술의 창달을 위해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게 자주 헌책(獻策)하여 많은 지원을 얻어낸 것은 문화예술계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크고 작은 회의에서 이 선생과는 여러 차례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는데, 이 선생은 자연스럽게 회의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분의 원만한 성품과 오랫동안 연극을 통해 익혀온 조화(調和) 감각의 소산(所産)이라고 여겨진다.”고 회고함으로써 그가 국회에서 한국문화진흥을 위해서 얼마나 열정적이었나를 짐작케 한다. 



    이해랑(李海浪)



문화예술진흥법제정 선도역할

이해랑은 특히 정부에서 발의한 문화예술진흥법(文化藝術振興法)을 국회에서 강력히 뒷받침하는 역할에 몰두했다. 그는 문예진흥법제정에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문화예술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했다. 그는 문예야말로 인간정신의 가장 뛰어난 표현인 동시에 일상적 삶을 뛰어넘는, 호한(浩澣)하고 위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조되는 독창적 산물임을 강조했다.

 

결국 문화예술진흥법은 그가 의회에 진출한 1년 뒤인 1972년 가을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때 그의 역할은 눈부신 것이었고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97211월 문화예술진흥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3월 역사적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초대원장에 절친한 친구 곽종원이 되도록 애썼다. 곽종원은 그가 예총 회장이었던 당시 부회장으로서 원만한 인간관계와 탁월한 행정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정회 임기만료, 정계와 결별

사실 그는 국회에 진출한 후 연극 동료나 후배들로부터 경원(敬遠)받았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결 같이 연극이 자기 인생의 전부였고 1976년 말을 끝으로 유정회의 임기만료와 함께 정계와 완전 결별하였다. 1976년도 말엽에 5년여만의 국회의원직을 청산한 그는 1년 남짓 쉬었다가 국회에 나가 있는 동안 떠났던 동국대학교 연극과에 복직했다. 그때의 사정을 그는 이렇게 회고 했다.

 

“1년 반여의 8대 국회가 끝나고 유신국회로 바면서 3년간 유정회 의원으로 의정생활을 보냈다. 이것으로 나의 정가(政街) 인연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국회 재직 중에도 연극 본업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고 연간 한두 편씩은 국립극장 연출을 맡았었다.” [정리:권동철]/주간한국 20191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