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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⑫‥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8. 12. 29. 01:51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황정순과 열연하는 이해랑


한국현대극장사에 있어서 가장 첨단적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센터는 유치진이 1931년 극예술연구회라는 신극 단체에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꿈꿔왔던 것을 현실화시킨 극장이었다. 유치진은 드라마센터를 통해서 전후 침체에 빠져 있던 연극의 중흥을 이루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우선 연중무휴 공연을 통해서 연극 전문화를 꾀해보려 했다. 이런 극장의 초대극장장에 이해랑을 앉힌 것이다. 그동안 가까웠다가 멀어지곤 하면서 애증의 감정을 가졌던 한국 연극계의 두 거인이 거의 마지막으로 결합한 것이었다.


196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기념사진


예술원상 수상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연출, 주연 등이 모두 그에게 맡겨졌다. 연극계에 입문한 지 30년이 넘은 데다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바라보는 중견 연극인으로서 이제는 자신의 연극 철학을 보여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뚜렷한 사건의 진전도 없이 오닐의 내면 고통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어려운 작품이었다. 게다가 연습 기간이 너무나 짧았다.

 

그는 뒷날 이 작품 연출과 관련하여 지난 나의 연극 생활을 통틀어 봐도 이 <밤으로의 긴 여로> 만큼이나 고통스럽고 난감했던 무대는 거의 없을 것 같다고 실토한 바도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대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치밀한 브로킹으로 대단히 격조 높은 환상 무대를 창출해냈다.

 

미국 연극에 밝은 극작가 이근삼은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이번 공연은 크나큰 감명을 주었으며 (……) 전체적으로 보아 공감을 주는 기록(記錄)에 남을 만한 공연이라고 평가해 주었다. 문학자 여석기도 “1956년의 뉴욕 초연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지만 이번 드라마센터의 공연도 근래에 보기 드문 수확이다. 원래 한국의 신극은 이러한 내면적인 작품을 좋아하는데 이번 것도 앙상블이 비교적 짜여 있고 그 많은 대사(그래도 많이 줄였다지만)가 이럭저럭 처리되어 있음은 꼼꼼한 연습의 공으로 돌려야 하겠다.”

 

확실히 이 작품은 그가 연극 인생 30여 년 만에 최대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으며 예술적 성취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공연이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영예로운 예술원상(작품상)을 받는 영광도 안았다. 


한국일보 창설자 장기영과 함께한 이해랑


신협 재건

어느 날 과거에 신협 동지들이었다가 영화계로 간 김승호, 최남현, 주선태, 박암, 조미령, 주증녀, 문정숙, 그리고 허장강(許長江) 등이 그를 찾아왔다. 연극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처럼 낭인 생활을 하고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일종의 옛 지도자에 한 안쓰러움과 울분의토로다. 이들은 즉석에서 신협 재건을 선언해버렸다. 그것이 그가 드라마센 터를 떠난 2개월여 뒤인 19633월이었다. 지난 시절 신협 동지들의 뜨거운 우정으로 용기를 얻은 그는 영화계의 허장강, 황해, 방수일(方秀一), 김성원 등 까지 포함시켜서 극단을 재건하였다.

 

신협 13년 만의 최대 호화 진용이었다. 그는 당시 신예 극작가로서 각광을 받고 있던 차범석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한편 제작비 조달에 나섰다. 신예 작가 차범석은 마침 문제작 <갈매기 떼>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에 신협으로선 일이 쉽게 풀려 나갔다. 문제는 제작비였는데, 그가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을 하면서 평소에 막역하게 지내던 한국일보 설립자 장기영(張基榮)을 생각해낸 것이다. 장 회장이 제작비 50만 원을 흔쾌히 쾌척해 주었기 때문에 재건공연준비는 대단히 순조로울 수 있었다.

 

장기영 회장은 제작비만 대준 것이 아니었다. 대원(大元)호텔의 커다란 홀까지 연습장으로 내주고 바쁜 시간을 쪼개서 자주 들러 격려까지 해주기도 했다. 이때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극작가 차범석은 저간의 사정과 관련하여 한국일보사 장기영 사장으로부터 재정적 후원과 적극적인 홍보 작전의 약속을 받아내었으니 이른바 신협재기공연(新協再起公演)이 실현될 단계에 와 있었다. 이 결실은 이해랑과 장기영의 끈끈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실은 외롭게 밀려만 다니던 이해랑의 연극재건에 건 열의와 집념에서 비롯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연극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장 회장은 단원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 ?한국일보? 문화면을 통하여 거의 매일이다시피 신협재건공연을 대서특필해 주기도 했다. 결국 이런 신협과의 인연으로 장기영은 뒷날 이해랑이동극장(李海浪移動劇場)을 후원하는가 하면 백상예술상(百想藝術賞)도 만들게 되었다


[정리:권동철]/ 주간한국, 20181228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