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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⑩‥오사량,김송, 조영암,조흔파,김광섭,이흥열,채동선,송범,김진걸,유치환,한노단,김동명,강계식,문정숙,윤인자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8. 12. 15. 01:01

신협의 <햄릿>(19519) 출연진, 앞줄 좌측에서 세 번째 이해랑, 네 번째 윤방일, 뒷줄 좌측에서 첫 번째 장민호, 네 번째 최무룡, 가운데 김동원.



30대 중반의 연극인 이해랑은 6·25전쟁을 어떤 궤적으로 밟아 갔을까? “6·25전쟁이 터진 것은 <뇌우> 공연이 끝난 며칠 뒤였다. 일요일, 극장에 출근해 발레를 구경하고 있는데 이상한 안내방송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든 국군은 즉시 소속부대로 귀대하라는 것이었다. 26일 월요일 극장엘 출근하니 북괴(北傀)38선 전역에서 남침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런데 28일 새벽 누군가가 요란히 문을 두드렸다. 아내가 나가더니 이웃에 사는 오사량이란 것이다. 오사량은 황급히 뛰어들면서 피신을 않고 무얼 합니까!’며 따지듯이 독촉을 했다. 정부는 이미 수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오사량의 독촉에 세수도 못하고 아내와 이별을 했다. ‘곧 수복이 될 테니 아이<장남 방주(邦柱), 당시 8>데리고 잘 있으라고 한마디 하고 문을 나섰다. 아들놈은 벌써 놀러나가고 얼굴도 보질 못했다.

 

비는 억수로 쏟아지면서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밤이 깊어갈수록 뚝 주위엔 피난민들로 가득히 메워졌다. 무릎을 쪼그린 채 길고 지루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을 맞았다. 날씨는 말갛게 개 있었지만 밤새 내린 폭우로 한강(漢江) 물은 엄청나게 불어 황토 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한강을 건너야 한다!’ 결심은 했지만 아무도 엄두를 내는 이는 없었다. 집과 가족이 딸린 피난민들은 당연했다. 나는 이틀 밤을 꼬박 새운데다 변변히 먹지도 못해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지쳐 있었다. 그래도 한강은 건너야 한다는 결심에 신은 팽개치고 바지를 벗어 목덜미에 동여맸다. 그리고 간단히 준비운동을 하고 도도히 흐르는 한강으로 뛰어들었다.

 

한강에 뛰어든 나는 침착하게 앞으로 헤어나갔다. 수영엔 자신이 있었고 지금도 그때의 실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물살이 세어 노량진역쯤에 가서야 닿았다. 맨발로 걸어 시흥까지 갔더니 거기서야 장국밥과 신을 팔았다. 요기를 하고 운동화를 한 켤레 사 신은 뒤 다시 걸어서 임시수도로 정했다는 수원까지 갔다. 천신만고 끝에 수원에 닿았으나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떠난 뒤다. 수원에선 용케 화물 기차간 한 틈새에 끼여 탈 수가 있었다.”



영화 <코리아>(19545) (왼쪽부터 이해랑, 김동원, 최은희, 복혜숙)


군 위문을 위한 연극

그는 비록 가족과는 헤어져 있었지만 큰 병원을 운영하는 부친 집에 있었기 때문에 생활은 피난민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편안했다. 전쟁 직후 부산에 피난 온 예술인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미처 서울을 빠져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평소 친교가 있었던 예술인들이 더러 피난 와 있었는데 가령 문인으로는 김송(金松), 조영암(趙靈岩), 조흔파(趙欣坡), 김광섭(金珖燮, 대통령비서관), 이헌구(李軒求, 공보처차관), 이서구(李起鵬, 서울시장비서관) 등이 있었고, 음악인으로는 이흥열(李興烈), 채동선, 무용인으론 송범(宋范), 김진걸(金振傑) 등이 있었다. 그리고 부산의 문인으로서 유치환(柳致環), 한노단(韓路檀), 김동명(金東鳴) 등이 있었다. 연극인은 더 많았는데 마침 부산에 공연을 왔다가 발이 묶인 극단 예술극회의 강계식, 문정숙, 윤인자 등과 보랑극단의 이향(李鄕), 한은진, 주증녀(朱曾女) 등이 있었다.

 

그는 우선 얼마 되지 않는 연극인들마저 전쟁터에 나가 죽으면 신극사의 맥이 끊어지리라는 우려 때문에 그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평소 안면이 있던 군인 시인 김종문(金宗文, 부산지구 군정훈감)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한 것이다. 김종문은 군인이기 이전에 시인이기 때문에 예술분야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다. 그는 이해랑의 하소연을 즉각 수용하고 문총(文總)구국대를 조직했다. 문총구국대는 군 위문을 위한 연극을 하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햄릿>

“<햄릿>의 첫날 낮 공연은 엉망이었다. 막을 올리니까 관객이 손으로 셀 정도로 몇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공연을 끝내고 분장실로 모인 단원들의 분위기는 무덤같이 침울했다. 나는 무슨 결함이 있다고 판단, 그 결함을 찾기 위해 책 읽기를 다시 하자고 권유했다. 코피를 쏟은 김동원이 반대했지만 내가 그래도 해야 한다고 우겨 소금을 섞은 주먹밥을 먹으면서 책 읽기를 새로 시작했다.

 

연기자들에게 연출자의 극적사상과 정서를 바람직하게 전달, 주입, 반영, 해석시키는 데는 책 읽기가 가장 적절한 조치이다. 단원들이 분발하여 책 읽기를 해 연극을 다시 한 번 정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어 그 뒤부터의 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책 읽기의 중요성을 실감한 나는 그 뒤부터는 종합연습을 끝내고 공연 첫날 전엔 꼭 다시 한 번 책 읽기를 하는 습관이 들었다.”

 

<햄릿>의 인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대구에서만 공연하고 막을 내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던지 그는 신협을 이끌고 전주, 목포, 부산, 마산, 진주 등 지방 도시로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햄릿>붐을 남부 전역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의욕에 따른 것이다. 공연은 가는 곳마다 호평이었다


[정리:권동철]/주간한국 201812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