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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⑦,김인순(金仁順),숙명고녀(淑明高女),도쿄(東京) 드레스메이커 의상전문학교,태화원(泰和院),무대장치가 홍성인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8. 11. 25. 17:22

숙명여고 졸업사진(맨 뒷줄 가운데 교복소녀가 김인순. 맨 뒤 둘째 줄, 왼편에서 두 번째가 이석희 여사(KBS 이인호 이사장 모친


이해랑은 1960년 초까지 20여 년 동안 무대 배우로 많은 여배우들과 무대에 섰지만 어느 누구와도 스캔들을 뿌린 적이 없었다. 그는 예술단체를 수십 년간 이끌면서 이성문제에 관한한 확고한 철칙을 하나 지켰는데 속된 말로 자기 집 닭은 절로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평소 배우들에게 유독 인격을 강조한 것과도 연관된다.

 

당시는 조혼풍습이 유행했기 때문에 24살의 청년이었던 그에게 집안으로 청혼이 많이 들어왔던 것 같다. 좋은 가문 출신에다가 일본유학출신의 미남청년이었으므로 자격구비요건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맞선을 본 신부집안 측에서는 언제나 반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배우라는 직업이 혼사를 그르치곤 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홍성인(洪性仁)이란 친구와 명동엘 나갔다. () 군은 무대장치가로서 도쿄학생술좌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인데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을 만났다. 누구냐 하면 바로 현재의 내 아내 김인순(金仁順)이었다.”

 

이해랑과 김인순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꽤 가까이 지낸 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인순은 내성적인 데다가 너무 얌전해서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이해랑은 연애 같은 것에 열정을 쏟지 않는 편이어서, 두 사람이 가까웠어도 그 이상으로 진전된 것은 아니었다. 학생예술좌 시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쓴 글이 있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은 이 단체가 베푼 어느 자리에서 동족(同族)이라는 반가움으로 자연스러운 첫 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때 이해랑 씨는 니혼대학 연극과에 다니는 학생, 김인순 씨는 도쿄(東京) 드레스메이커라는 의상전문학교에 다니는 멋쟁이 모던 걸이었다. 말하자면 그즈음 많은 남성의 흠모대상이 되었던 신여성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런 첫 대면 이후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필요 이상일 만큼 무심했고 담담하게 헤어지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어떤 격렬한 감정을 숨기기 위한 그들 나름의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사학명문 숙명고녀(淑明高女)

압록강하류 의주(義州)에서 가까운 용천군(龍川郡) 부라면 덕암동 103번지가 원적인 김인순의 부친 김상주(金尙柱)는 선친으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은 지주였다. 그의 조상은 안동(安東) 김씨로서 세조 때 생육신사건과 관련되어 멀리 국경근처로 피신해서 그곳에 정착한 양반가문이다. 김씨 집안이 기독교(장로교)에 귀의한 것은 선천(宣川)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면서부터였다.

 

철산출신의 여장부 최옥녀(崔玉女)가 시집갔을 때 벽장과 뒤주에 은전(銀錢)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부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능란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서 인순과 아들 형제를 두었다. 적극적이고 여장부적인 모친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자란 딸이 인순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그녀는 총명하고 발랄한 소녀로서 일찍부터 기독교에 깊이 빠졌다.

 

그녀는 모친의 극진한 사랑과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모친 최옥녀는 용모가 단정 하고 신심이 깊었기 때문에 장녀 김인순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용천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몇 명의 고향친구들과 함께 당시 최고의 사학명문인 숙명고녀(淑明高女)에 응시했는데 그녀만 합격했다.

 

숙명고녀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인순은 이화(梨花)여자전문학교 문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그녀는 교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화여전을 1년만 다니고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장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의상전문학교를 택한 것이다. 아마도 당시 조선여성으로서는 최초였을 것이다.

 

태화원(泰和院)서 결혼식

세월은 흘러 그녀가 우연찮게 이해랑을 명동길거리에서 만난 것이다. 이해랑은 회고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그 후 몇 번 만나는 일을 거듭하면서 나는 감히 얘기를 못하고 홍()을 통해 의사타진을 시켰다. 내가 우선 걱정한 것은 김인순이 그동안 결혼을 했느냐 여부였다. 만일 결혼을 안 했다면 프러포즈를 해볼까 한 것이다.

 

홍성인 군을 방자로 삼아 내보낸 셈인데 결혼을 안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하나 그 당시는 정말 갈 곳이 없어 장충단, 창경원 그리고 황혼다방 세 군데를 옹색하게 번갈아 다녔던 일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그 후 1941년 봄, 태화원(泰和院)강당(지금의 종로서 자리)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이 치러졌다. 구체적으로 혼담이 오가고 1년이나 지나서였다. 부유했던 신부 측에서 신혼부부를 위해서 돈암동에 아담한 기와집 한 채를 사줬다. 아주 행복한 신접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정리:권동철]


주간한국/201811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