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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⑥,고협(高協),이여성(李如星),유자후(柳子厚),함화진(咸和鎭) ,대화숙(大和塾),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8. 11. 16. 20:35

<춘향전>에서 방자 역으로 출연한 이해랑(



이해랑은 우여곡절 끝에 연극에 빠져서 대학4년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는 귀국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일제의 대화숙(大和塾)이었다. 사상범과 관계없이 경찰에 한 번 붙들려갔던 사람은 무조건 의무적으로 대화숙 명부에 올라 있었다. 정기적으로 보호관들로부터 선도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대화숙에 오라해서 갔더니 마치 우리나라 명사들의 시장 같았다. 예를 들면 유억겸(兪億兼), 여운형(呂運亨), 윤치(尹致暎), 장덕수(張德秀), 송진우(宋鎭禹), 장택상(張澤相), 조병옥(趙炳玉)씨 등이 떠오른다. 일본은 그게 요시찰 인물로 매겨 놓고 꼼짝달싹 못하게 감시한 것이다.

 

나는 왜놈이 처음 보호관이었다. 불려서 갔더니 이제 뭐하겠느냐고 했다. 연극을 하겠다고 하니까 임마 학교 졸업하고서도 연극단체에 있어 갖고 경을 치지 않았느냐.’ 나는 도저히 능력이 없다고 버텼다. 완강히 거부했더니 저희들이 극단을 소개해 줄 테니 가라고 했다.”

 

일본 교화원은 이해랑을 한국인 교화원 한학수(韓學洙)에게 인계했다. 그가 서울 불광동 근처에 우시장(牛市場)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한 주막을 연극단용()으로 내준 것이다. 여기서 탄생된 극단이 다름 아닌 고협(高協)’이었다.

 

고협 극단은 다분히 어용극단의 성격이었기에 나 같은 문제아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어 당국 도 이를 받아들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사세부득이한 입단이었으나 아픔을 깨물면서 수락한 것은 누차 강조하지만 연극 외는 나의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협은 신극을 표방했으나 냉정히 평가해 대중성격의 신파극단 쪽에 가까웠다. 도쿄 유학생의 허울을 벗어던진 이때의 용단은 나 개인의 의미를 흐린 감도 없지 않으나 대신 나의 연극 인생을 살찌웠다고 자신한다. 고협을 통해 신파와 대중연극의 진실을 알게 됐고 여기서의 체험이 훗날 연출가 생활에 단단한 바탕이 됐던 것이다.”

 

이해랑이 고협의 <춘향전> 공연에서 인상 깊게 배운 것은 철저한 프로 정신이었다. 고협은 수 익을 올리기 위해서 철저하면서도 주도면밀한 홍보 전략을 구사했다. 당대 최고의 복식 전문 가 이여성(李如星)의 의상 고증과 유자후(柳子厚)의 소도구 고증 그리고 함화진(咸和鎭)의 음 악 고증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학술적인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로서도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무영탑>의 주역을 맡는다. 고협의 중견 배우들은 기라성 같은 신파극스타들을 배제하고 이해랑 같은 백면서생, 이름 석 자도 없는 신인을 주역으로 내세울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을 맡은 유치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협이 이해랑을 일약 주역으로 발탁한 것부터 연극계의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의 뛰어난 연 기력은 다시 한 번 기성 연극계를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더욱이 당대 최고의 문사였 던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호평이 그의 인기를 수직 상승시켰다. 그는 1940년 초두에 전 연극계에서 가장 유망한 신예배우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조선임시보안령 공포

일본군국주의자들은 1941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을 공포했으며 그 법령에 근거하여 전시하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초비상의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총독부는 12월 말에 소위 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를 강제로 조직하고 모든 극단을 소속시켜 통제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때에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삶을 포기하는 각오로 연극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정리:권동철]/주간한국, 201811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