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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⑧‥극협(劇協),유치진,자명고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8. 12. 2. 23:59

극협의 <자명고>(유치진 작) (좌측 이해랑)



해방과 이데올로기

 

 

광복을 맞았다. 이해랑 아내의 첫마디는 당장 서울로 가시오.”였다. 연극을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이제 나라가 주권을 찾고 독립했으니 도쿄 유학까지 다녀온 젊은 청년으로서 할 만한 일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해방된 다음 날 만삭이었던 아내와 세 살 난 아들 그리고 처가 식구들과 헤어져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은 흥분과 감격, 희망의 와중에 휩싸여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인들은 귀국하느라 정신없었고, 한국인 중 부도덕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저들이 남기고 간 가옥, 세간 등과 창고에 쌓인 물품을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치, 사회단체들이 하루에도 몇 개씩 등장하고 시민들은 흥분과 감격을 이기지 못해서 거리에 쏟아져 나와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모두 허황되게 먼 돈이 굴러 떨어지지 않나 찾아다니는가 하면 횡재의 건덕지가 길에 즐비하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내가 떠날 때 큰아들이 세살이고 아내가 장녀를 임신한 걸 보고 왔던 터다. ‘이제는 자식도 둘이니 연극을 해서는 도저히 앞으로 가족부양을 못할 것이다. 가족들을 위해서 어떤 착실한 월수입이 생기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데 막상 서울 와서 보니 꼬락서니가 그랬다. 제대로 정신 박힌 사람을 10명에 두세 사람 찾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민주주의의 신봉자

해방이 되고 달포 뒤부터 좌익 연극인들이 조금씩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하나의 예가 다름 아닌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의 결성이었다. 좌익 연극인들이 노골적으로 색깔을 드러내면서 활기찬 연극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령 조선연극동맹이 19472월초에 소위 연극중화운동을 벌인 것이야말로 본격 좌익운동의 기치를 올린 것이었다. 물론 우익민족진영도 조금씩이나마 움직임이 있었다. 가령 극단 전선을 비롯해서 이광래(李光來) 주도의 민예(民藝)도 그런 노선의 극단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뇌했다. “나는 사상으로 어떤 주의라는 것에서는 그 사람들과 이질이다. 나로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추종할 수가 없다. 연극인으로서 나는 연극의 자유, 생활의 자유를 추구한다. 그것이 소위 민주주의라 한다면 나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인 셈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기 힘들었다. 그는 가문상으로도 전형적인 부르주아 출신이지만 정서상으로도 자유주의자였던 것이다.

 

우익극단-극협(劇協) 

19474, 극예술협회(극협 劇協)라는 본격 극단이 출범된다. 극협은 이름을 외적으로 발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치진을 명목상 대표로 했고, 이해랑, 김동원, 이화삼, 박상익, 김선영, 조미령 등을 창립멤버로 조직되었다.

 

실제로 이해랑이 극예술협회라는 본격 우익 민족진영 극단을 조직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미군정의 정치적 뒷받침 때문이었다. 가령 1947년 초에 수도 경찰총감 장택상(張澤相)극장 안에서의 예술을 빙자한 정치선전 금지조처를 내린(?경향신문?, 1947. 2. 3.) 이후 좌익 연극이 급격히 쇠퇴하는 조짐을 보였다.

 

이때도 운 좋게 재정적 후원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다름 아닌 한국문화흥업사(韓國文化興業社)였다.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극협은 즉각 연습에 들어갔는데 레퍼토리는 유치진의 역사극 <자명고>였다. 유치진이 구태여 극협의 창립 공연에 <자명고>를 권한 것은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민족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이해랑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명고> 공연 시 잊을 수 없는 일은 신민당 당수 이철승(李哲承)씨의 공연보호조치다. 연극계뿐만이 아니고 문화계 전반이 온통 빨갛게 물든 때라 좌익계의 준동은 공공연한 테러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남로당 괴수 박헌영이가 외신(外信)기자들에게 조선의 소련 방화를 떠벌려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것도 바로 이때다. 민족진영으로선 유일하게 정돈된 극예술협회의 출현은 좌파연극인들에게 도전장을 던진 셈이고 따라서 방해 공작이 당연했다.”

 

좌익연극인들의 공적 제1

이해랑은 좌익 연극인들의 공적 제1호로 지목되었다. 그에게는 좌익 연극인들로부터 심심찮게 협박장이 날아들곤 했다. 한결같이 붉은 잉크로 써 보낸 협박장의 내용은 반동 연극을 중지하고 자중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물론 가족까지 몰살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딸(명숙 明淑)을 얻은 직후여서 가족들의 걱정은 태산 같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런 때에 힘과 의협심이 강한 청년 오사량(吳史良)이 나타났다. 극협의 연구생으로 들어와서 배우수업을 받고 있는 오사량은 체격도 건장한데다가 이해랑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신변 보호에는 적격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으로는 여러 명의 독 오른 좌익 연극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한 회고에서 오사량과 동행하던 어느 날, 우연히 학생좌 멤버였던 무대장치가 홍성인 을 만나 대폿집을 찾게 됐다. 한창 술기가 오르는 판에 안영일, 이강복, 이서향, 조영출 등 좌익계 일당 여섯 명이 불쑥 나타났다. 작심하고 나타난 이들은 우리들에게 시비를 걸었고 급기야는 육탄전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중과부적, 우리는 녹초가 되도록 얻어맞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를 때린 좌익 연극인들 중 이서향은 도쿄 학생예술좌 때 함께 연극을 한 친구였고, 조영출은 도쿄 유학 때 쓰루마끼죠(鶴卷町)에서 한방 하숙생으로 지내며 대단히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해방 직후는 어제의 단짝 친구라도 연극 노선이 다르면 증오하는 적이 되어 피투성이 싸움을 벌일 만큼 이데올로기 대립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사의 대세 속에서 분단의 벽을 경계로 하여 각자의 길을 걷는 것으로 일단 정리가 되었다


[정리:권동철]/주간한국 2018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