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자료

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③‥일본경찰에 고문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8. 10. 27. 00:43

    이해랑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 달 동안 고문에 견딘 후로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 내가 배고프고      외면당한 연극을 한 결 같이 지켜온 것도 오로지 고문을 견디어온 지구력(持久力)의 덕분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구금사건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강인한 참을성일 것

 

1935년 대학에 입학한 이해랑은 지난 시대의 번잡한 생활과 방황을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일본 경찰에게 뜻밖에 체포당한 것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다반사로 있는 일이었다. 그가 왜 일본경찰에게 체포당했으며 또 어떻게 곤욕을 치는가에 관해서는 그 자신이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

 

어느 날 강의를 듣고 있는 데 학생처 교수가 잠깐만 나오라고 했다. ‘이상하다하며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와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처에 갔더니 왜놈 형사 둘이 있었다. 나는 그 길로 강의를 듣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모토후지(元富土)란데 경찰서가 있었다.

 

저녁이 되어 간수가 혁대를 우선 풀게 하고 끄나 풀, 소지품을 봉투에 넣게 하곤 영문도 모르고 처넣어졌다. 캄캄한데 한참 서 있으니 사람 윤곽이 보였다. 왜놈 죄수들이다. 한 놈이 소리를 질렀다. ‘인마 왜 서 있냐. 인사도 할 줄 모르느냐그중에 표독하고 날카롭게 생긴 놈이었다. 아하 이 놈들이 텃세를 하는 구나. 그제야 난 꿇어앉아 난 아무개다,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그러냐 하며 한쪽 구석 똥통에다 앉혔다.

 

다음 날 나를 불러냈다. 들어가니 낯선 두 놈이 와 있었다. 경시청 고등계 형사들이다. 나이가 40여세 돼 보이고 몸도 아주 다부지고 표독스런 왜놈의 얼굴이다. 취조실로 가니 문을 잠그고 하여튼 묻기 전에 대뜸 두들겨 팼다. 꿇어 앉혀놓고서 한 놈은 내 두 손을 머리위로 나눠서 붙잡고 한 놈이 왜놈들 검도하는 작대기로 두들겼다. 한참 그러니까 기절할 지경이었다.

 

상하이에 갔다 오지 않았느냐그러고는 도쿄에 언제 뭣 때문에 왔냐는 것이다. 그놈들이 나한테 둔 혐의내용인즉 바로 내가 도쿄에 가기 전 사쿠라다몬[일본(日本)의 궁성(宮城)]사건이 있었다. 우리나라 극렬청년독립투사가 일() 천황이 궁성에서 나오는 걸 기다렸다가 폭탄을 던진 사건이다. 한데 그 사람이 장개석(蔣介石)의 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그 학교에서는 김구(金九)선생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했었다. 내가 상하이에서 왔다니까 폭탄사건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냐는 거다.

 

누가 보냈느냐다그치니 어이가 없었다. 나로서는 독립운동이니 뭐니 그런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까무러쳤다 깨어나면 두들겨 패고 유치장에 넣고 연일 그랬다. 일요일하고 경조일은 빼고 그게 석 달 반, 4개월 가까이 지냈다. 거꾸로 매달아 물을 먹이는 등 무서운 고문을 당한 것이다.”

 

결국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석방되긴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그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미결수로서 유치장에 있을 때나 고문 후유증으로 객지의 하숙방에 누워 있을 때나 고독을 되씹어야 했다. 그가 수모를 당하는 과정에서 특히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상당한 후유증을 낳았다.

 

일본 경찰로부터 당한 뜻밖의 고통에 따른 트라우마로 일본에 대한 증오와 함께 대인공포증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가 구금사건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강인한 참을성일 것이다. 귀골(貴骨)로 자라면서 인내력과 절제력이 부족했던 그지만 유치장 생활 4개월여 동안에 거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성숙해 있었다. [정리:권동철]


주간한국 201810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