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이해랑
고독과 절망 시련의 계절
스무 살‥문학의 가치와 예술의 위대성에 개안
이해랑은 1916년 7월 22일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 와룡동 27번지에서 사대부 명문가의 손으로 태어났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근용과 남양 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모는 본래부터 약한 체질이어서 유모까지 두고 그를 보살폈다. 이름은 돌림자를 따라 해량(海良)으로 지었는데 말을 배우기 시작하던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음 착한 유모를 생모처럼 의지하면서 성장했다. 그가 회고의 글에서 “4세 때 돌아가신 어머님은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고 할머니마저 일찍 별세하셔서 엄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외롭고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예술에 산다」)고 쓴 바 있다.
일곱 살이 되면서 집에서 가까운 교동국민학교(校洞國民學校)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들하고 노는 것만이 제일 즐거운 일이었는데 의협심이 강하고 강골이었던 김두한(金斗漢)을 만나 사귀기도 했다. “그 시절 잊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외롭다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거나 학교에 가거나 늘 그랬다. 친구들도 많지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음악시간이 좋았다. 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한 해가 가고 휘문중학에 입학했다. 부친의 모교고 또 거기서 부친이 잠시나마 교원 생활도 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방학 동안 친구와 함께 만주로 무전여행을 떠났는데 신의주를 거쳐 안동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 헌병의 불심검문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 조선청소년들은 무조건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던 시절이므로, 그가 아무런 증명서나 목적도 없이 만주로 여행 왔다는 것은 충분히 구금당할 만한 일로 여겨졌다. 결국 부산병원으로 전보를 쳐서 부친이 각서를 쓴 다음에야 석방 될 수 있었다. 그는 귀가해서 조부모와 부친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고 교칙 위반으로 휘문중학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는 곧바로 배재중학에 편입할 수 있었는데 후일의 절친 김동원[金東園, 본명 동혁(東赫)]이 다니고 있었다. 두 소년 은 역설적으로 성향이 다른 까닭에 급속히 친해질 수 있었다. 김동원은 공부도 잘하고 품행이 매우 단정한 모범생이었다면, 이해랑은 그대로 노는 건달(?)형 학생이었다. 김동원의 이해랑에 대한 첫 인상은 매우 경탄(?)스러울 정도로 유니크한 것이었다. “인사는 서로 안 하고 지냈어도 옷 잘 입고 멋쟁이로구나 생각했어. ‘모던 뽀이’야, 해랑은 모던 뽀이어요. 그러니까 학생들 눈에 딱 띄었지.”
그러나 장난삼아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낸 것을 트집 잡아 그 학교도 중도 퇴학당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가문은 중동학교 설립자 조씨(趙氏) 집안과 오래 전부터 친분 관계가 두터웠던 터라 두 번째 편입 역시 쉽게 이루어졌다. 중동중학 4년을 졸업하게 되었는데 당시 중동학교는 각종학교였기 때문에 대학입학자격이 없었다. 결국 조부모와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과거에 부친이 공부했던 교도로 갔다.
1933년, 그의 나이 17살 때 혼자서 일본으로 건너가 료요(兩洋)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그런데 그는 일본 학교에서도 제대로 적응을 못해 부친의 권유에 따라 또다시 가네가와(金川)중학교 5학년으로 편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34년 3월에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6년여 동안에 다섯 개의 중학교를 다닌 셈이다.
이후 미지의 세계,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중국 상하이를 머리에 떠올렸다. 일찍이 유럽유학을 한 개방적 성격의 숙부를 멋쟁이 신사로서 좋아했기 때문에 상하이로 갈 결심을 한다. “숙부는 나를 호강대학(滬江大學, 지금의 상하이대학)에 입학시켜 주었다. 그 학교는 중국인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다. 그러나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학기를 마친 뒤 장질부사에 걸렸고 사나흘 인사불성이었다가 열도 오르고 사경을 헤맸다. 4개월 입원을 하고 나오니 상하이에 넌더리가 났다.”
◇매우 중요한 내적변화
스무 살의 팔팔하고 기운이 넘치는 그로서는 집에서 무위도식하며 지내는 것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선구적인 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을 일컫는다. 1920년대 초부터 이 땅에 신무용을 도입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남성 무용수다. 1920년대에는 세 명의 선구적인 무용가가 있었는데 조택원을 비롯해서 배구자(裵龜子), 최승희(崔承喜)가 바로 그들이다.
조택원은 휘문중학 때 이해랑의 부친으로부터 생물을 배운 제자다. 부산에 공연차 왔다가 스승인 이근용의 병원으로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한테 간청을 한 것이다. ‘여보 조 선생, 나는 일본에 가서 공부 좀 하고 싶은데 선친을 설득 좀 해주시오.’ 그가 무슨 공부를 하고 싶으냐고 물어서 나는 문학에 뜻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니혼(日本)대학 예술과다.”
그는 몇 달 집에서 빈둥거리는 동안 세계문학 전집과 일본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의 가치와 예술의 위대성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개안해가고 있었다. 이는 그로서도 매우 중요한 내적변화였고 중대사라 아니할 수 없었다.
[정리:권동철]/주간한국 2018년 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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