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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④‥아하 이게 연극이구나!, 도쿄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 기관지 '막'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8. 11. 3. 14:55


학생예술좌 모임. 둘째 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이해랑



도쿄학생예술좌민족문화운동 일익 담당한 특별한 의미 지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곤욕을 치르고 나온 그는 어느 날 김동원을 만났다. 학생예술좌에 가입해서 아마추어지만 연극을 같이 해보자는 것이었다. 도쿄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유학생들이 1934624일 도쿄시 우입구 고전정 11번지의 하숙집에서 창단한 학생 아마추어연극단체다.

 

창립 멤버는 박동근(朴東根, 법정대), 주섭(朱永涉, 법정대), 마완영(馬完英, 법정대), 이진순(李眞淳, 니혼대), 허남실(許南實), 김동원(니혼대), 한적선(韓笛仙, 니혼대), 임호권(林虎權, 니혼대), 김화(金永華, 니혼대), 김용하(金龍河), 유종열(劉宗烈, 와세다대), 황순원(黃順元, 와세다대), 주경은(朱敬恩, 문화학원), 김수(金永壽, 니혼대) 14명이었다.

 

실제로 지식청년들의 아마추어 연극단체들 수십 개가 3·1운동직후로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부침하면서 민족문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생극은 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그나마도 쇠퇴 일로를 걷고 있을 때 도쿄 유학생들이 연극 단체를 만들었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해랑의 데뷔작 <춘향전>의 한 장면


<춘향전>에서 생애 처음 단역

이해랑이 학생예술좌에 가입한 것은 창립1년 뒤인 1935년이다. 그는 회고의 글에서 그렇게 나는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이 연극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내가 살 수 있는 세계라고 느꼈다. 마치 연극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해방을 만나듯 그런 기쁨을 얻었다. 내가 억압당한 인생에 해방을 가져다준 것이다라고 하며 진정으로 뭔가 막연하게 찾고 있던 돌파구를 만났다고 확신한다.

 

때마침 극예술연구회의 창립 주역으로서 최초의 본격 사실주의 희곡인 <토막>, <버드나무 선 동네풍경> 등을 발표하여 주목 받기 시작한 유치진이 연출 수업을 받으러 도쿄에 왔다. 평생의 연극동지이자 선배인 그를 만난 것이다.

 

이해랑은 학생예술좌의 제2회 공연작품 <춘향전>(유치진 작)에서 생애 처음으로 단역을 맡게 되었다. 그때의 사정을 생생하게 회고했다. “나는 세 가지 역을 맡았는데 사령, 농부, 그리고 잔치 장면에서의 지방관리 역이었다. 무대연습 하는데 분장을 하고서 했다. 얼굴에 주름살도 그리고 수염도 붙이고 가발도 씌웠다. 거울에 비춰 보니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스무 살 먹은 내가 6070세 노인이 돼 버렸다. 나는 그때 내가 연극에 첫발을 디디면서 처음 한 말을 기억한다. 아하, 이게 연극이구나!”

 


학생예술좌 기관지


예명 이해랑탄생

한편 이 시기에 이름을 예명이라는 명목으로 바꾼다. 그는 자호통명(字號通名)이라는 신문 칼럼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바다 해() 자는 돌림자고 그 밑에 어질 량 자가 붙은 해량(海良)이 나의 본명이다. 도쿄학생술좌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연극을 하던 때 배역 표에 나의 이름을 써놓고 보니 어디 한군데 빠진 것 같은 감이 들었다. ‘이해(李海)’ 두 자를 밑에서 받치고 있는 ()’자가 어딘가 허전한 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즉석에서 남들이 나를 곧잘 해랑이라고 부르던 일을 생각하고 그 옆에다 삼수변을 찍어 넣어 위의 두 자를 버티고 서게 하였다. 그 후부터는 나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써놓고 보면 듬직하고 부르기도 편하고 하여서 나는 해랑이란 이름이 본명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다시없이 낭만적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해랑의 첫 번째 주연작 <지평선 너머>의 두 장면


연극계몽운동 주장

연극의 진미를 알기 시작한 그는 국내외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생활을 했다. 19376월 중순에 귀국하여 대학의 예술과 학생들과 함께 전국은 물론이고 만주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하계휴가 유학생 향토방문이라는 명목으로 전국과 만주의 간도지방까지 두루 돌아볼 수 있는 순회공연을 가진 것이 그에게는 대단히 좋은 체험이 되었다.

 

특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고 시급한 것은 연극계몽운동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뒷날 이동극장운동을 펼친 것은 젊은 날 몇 번의 지방순회공연에 참여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내면 깊숙이에서 조그만 씨앗으로 움텄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평선 너머> 주인공역 맡다

이해랑은 19386월 쓰키지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학생예술좌 창립5주년기념공연작품 <지평선 너머>(유진 오닐 작)에서 주인공 로버트 메이오 역을 맡았다. “내가 그때 주연을 처음 맡고 보니 1막부터 부담이 아주 많았다. 처음으로 큰 배역을 맡은 나는 무거운 짐을 안은 격이었다. 거의 침식을 잊어버리고 배역에 열중했다.

 

그러나 연극이란 것이 어느 정도 진실한 감정을 느끼면서 했을 때 안정감을 갖고 관객이 어떻게 보든 평론가가 혹평을 하든 창조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안 된 것이다. 그 어색한 동작, 어색한 행동. 뭔가 이게 아닌데 하면서 행동만하고 대사만 외고 있었다.

 

그때 당시도 불만이었고 오늘 50년 이후에도 불만으로 남아 있다. 그 후로 쭉 리얼리즘 연극을 해오면서도 연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다. 연극은 현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연극의 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


[정리: 권동철]/주간한국 2018년 11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