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자료

[주간한국]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⑬‥이동극장운동,무대미술가 김정환(金貞桓),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9. 1. 4. 18:08


김종필과 함께 한 이해랑



이동극장운동 서막

 

 

이해랑의 인생을 크게 변화시키는 뜻밖의 일이 생겨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치와의 인연 맺기다. 5·16 군사혁명 세력이 민간 이양을 앞두고 정당조직에 나서면서 그를 문화계의 대표인물로 창당 발기인으로 영입한 것이었다. 혁명의 젊은 리더였던 김종필이 그를 직접 불러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창당발기인이 되어달라고 완곡하게 요청했다. 물론 혁명주체들이 주축이 되고 정계, 관계, 법조계, 언론계, 재계, 학계, 문화계 등 각계에서 명망 높은 인재 78명으로 구성되어 1963118일에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무지개> 공연 후 어느 날 김종필 씨가 사람을 보내와 면담을 요청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정치, 경제, 종교, 언론 등 각 계층의 지도급 인사 20여 명이 모였고 예술계로선 나 혼자뿐이었다. 나와 김종필 씨와의 상면은 드라마센터 개관 때 <햄릿> 시연회를 마치고 장막 뒤 막걸리 파티장에서가 처음이었다. 그는 민정이양을 앞두고 정당 활동이 시작됨을 알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면서 동석자들의 의향을 물었다. 그 자리가 바로 공화당 창당의 모태고, 나는 창당발기위원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정계와 기연(奇緣)을 맺게 된 출발점이었다.”

 


특별히 제작한 이동극장 차량 


한국일보 주최행사로 받아들여

이해랑은 이동극장운동을 제창 한다라는 1960년 중반의 가장 중요한 글을 발표한다. “국민 속으로 퍼져 들어가 공동체 의식(共同體 意識)을 발견하고 정신적 일치를 꾀할 수 있는 다수를 위한 연극 형태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적은 관객을 상대로 꼴짝거리다가 오늘의 침체를 초래한 연극이 여전히 소극장에서 한가히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는 거대한 탈출구로서 이동극장운동의 절실함을 느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것을 역설하여 왔던 것이다.

 

문화 과잉에 빠진 도시에서 뛰어나와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자칫하면 거칠어지기 쉬운 이들 농어촌민의 정서를 함양하여 국민 전반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일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문제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대한 전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이동극장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실천에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단 대학동료교수인 대표적 무대미술가 김정환(金貞桓)에게 이동극장 무대의 디자인을 의뢰하였다. 그가 김정환에게 자신의 구상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교통비와 숙식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대형버스를 이동생활 거처 겸 식당분장실로도 사용토록 함은 물론이고 차체 앞뒤에 간이무대를 설치하여 배우들의 등퇴장이 버스 안에서 가능토록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는 세계연극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유니크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서 전국을 다녀야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이었다. 이때 비로소 그에게 집권당의 창당 멤버로서 크나큰 효험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실권자 김종필과의 정치적 인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이처럼 세부계획까지 마련했음에도 후원자가 나타나지 않아 공염불로 맴돌고 있었다. 이동극장 구상 3년째를 맞는 어느 날 김종필 씨가 술자리에 초청했다. 이때 그는 한동안의 외유 길에서 갓 귀국한 참이었다. 나 외에 김성진(金晟鎭)씨 그리고 술집과 지면 관계로 알던 평론가 이진섭(李眞燮)이 동석했다.

 

별달리 특별한 목적의 회동이 아니고 그야말로 오붓한 사석 주연이었다. 이런저런 방담 끝에 우연히 문화계가 화제로 등장했고 나의 이동극장 계획이 토설됐다. 대단한 관심을 나타낸 김종필 씨는 매우 멋진 생각이라면서 가능한 한 지원을 확약했다. 마침 김종필 의장은 예술을 좋아하는 낭만적 기질의 소유자여서 이해랑의 구상이야말로 대단히 기발하면서도 국민단합과 계몽에 더없이 훌륭한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얼마 후 그는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어김없이 약속을 지켰다. 대형버스와 소형 사령차를 제공했으며 일체의 제반경비를 부담했다. 이때만은 버스가 화젯거리였다. 지금의 고속버스보다도 덩치가 크다보니 당시의 빈약한 도로사정에 비추어 운행허가문제로 한동안 속을 썩였다. 그러나 홍보를 위한 지상(紙上) 후원이 필요하다 생각해 신협 초기 때 호의를 보여준 장기영(張基榮) 씨를 찾았다. 그 역시 단숨에 수락, 한국일보 주최 행사로 받아들였다라고 회고하였다


[정리:권동철]/주간한국 2019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