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30×60㎝ 한지에 석채, 2016
사랑스럽게 조용히 움직이다 위협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 육중하고도 장엄한 아름다움의 위안, 힐링의 바다여! “빈자리 쓸린 해안에서 나를 다시 잡아 세워준 것, 고마운 인사도 전하기 전에 창백한 얼굴로 돌아선다. 그래, 약속하마, 종내 보이지 않던 외로움, 눈발 속에서 잠시 눈뜨고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나갔는가. 함박눈 울고 있는 이 저녁바다.” <마종기 시, 겨울바다, 문학과 지성사>
천천히 바닷가를 걷는다. 잔잔한 파도도 조심스레 뭍으로 밀려드는가. 바위를 지나 실바람에 실려 눈 녹듯 사르르 밀려 온 하얀 포말은 순결한 영혼처럼 윤기 나고 영롱하다. 타메쪼 나리타(Narita Tamezo)의 첼로 곡, ‘해변의 노래’가 애수에 젖은 채 미묘한 선율로 물결위에 얹힌다. 헤어짐이 아쉬운 한줄기 빛이 백사장에 여름의 추억을 기록하려 짙푸른 펜을 꺼내 들었다. 화면은 바다와 산봉우리 그리고 달이 특유의 청록과 연갈색 등 색감으로 아득함과 가없는 시간의 역사를 펼쳐놓는다.
45×38㎝, 2014
작가는 이전작품들에선 꽃을 많이 그렸다. 예전에 살던 집 정원은 봄부터 늦가을까지 늘 꽃들이 피고 지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꽃을 만나고 우주 삼라만상 비의를 함의한 존재로서 삶이라는 여정의 이치를 은유해 냈다. 그러다 9년 전 강릉으로 와 살면서 ‘바다’작업은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 생활공간서 멀지 않은 바다를 찾게 되면서 조우하는 교감은 여행과는 또 다른 무엇이 와 닿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사소한 것 같지만 순간순간 변화무쌍한 날씨며 봄에서 여름을 넘어가기 전 약간 무거운 날의 바닷가, 진눈개비 휘날리는 겨울날의 고독 등의 풍경은 오롯이 작가의 고유한 색감으로 반영되는 것이다. 소재로 바다와 산 등에 천착하는 의미에 대해 물어보았다. “자연을 찾아간다는 건 쉼을 갖게 되고 위안을 만나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특히 바다와 묵상하듯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면 자연에 비해 인간은 참으로 작은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깊게 느끼게 된다.”
45×38㎝, 2015
◇그림은 ‘내게’ 집중하는 것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집안환경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접했다. 그러한 예술적 자양분이 성장의 많은 밑거름이 되었고 또 학생시절 여러 종류의 미술을 만나보았으나 한국화가 가장 체질에 잘 맞는 것을 스스로 체감한다. 그리고 지금, 가능한 한 전통적인 채색화의 방법을 고수하려한다. 활용편리성과 강력하게 전달되는 것에 대한 재료의 혼용은 고유의 정체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한국화를 전공했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처음에 배웠던 종이의 선택과 배접 등을 유지시키려 하고 변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작업 역시 한지 배접을 하고 먹(墨)과 채색화 물감을 차곡차곡 쌓는 중첩을 통해 깊이를 우려낸다.
“채색화를 선택하면서 일상의 감정이나 생활 등에서 절제를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모든 걸 다 하면서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림 작업이다. 나름대로 해야 할 것과 안해야 할 것을 구분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걸 결정하고 실천한 것이 내 작업의 힘이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화가 하연수
하연수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대학원박사 졸업했고 인사아트센터, 가나아트스페이스, 강릉시립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22회 가졌다. 현재 강원도 강릉시 죽헌길 소재, 국립강릉원주대학교 예술체육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관람자와의 작품교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어떤 소재든 늘 바람이 있다면 나의 그림을 보면서 편안함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감상자와 공감의 소통이 이뤄질 때 오는 희열 같은 것이 제일 가슴 따뜻한 보람과 격려가 된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주간한국, 2016년 9월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