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찌꺼기를 걷어내면 부옇게 맑아지려나. 무념처럼 텅 빈 공간에 시선이 머무르는 순간 길손처럼 아련한 빛의 흔적이 잡힐 듯 부유한다. 촉촉한 대지의 수분을 힘껏 빨아올린 대밭(竹林)은 생기가득한데 댓잎 새싹이 하느작하느작….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나태주 詩 ‘대숲 아래서’, 시화집 ‘너도 그렇다’, 종려나무>
가을햇살이 서울서촌골목 어느 집 회백색 담벼락으로 비스듬히 스며드는 오후 한 카페서, 사물에 대한 직관을 중시하듯 나직하고도 진지하게 화법을 풀어가는 작가와 인터뷰했다. 그는 지난 1990년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인근 갤러리 앤 루프(galerie Anne Rouff)에서 골목, 새, 공원 등을 소재로 한 흑백사진으로 첫 개인전을 가졌다. ‘대숲’작업은 2002년도 12월 금호미술관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15년여 동안 이어지고 있는 테마 인데 당시 전라남도 담양군 소쇄원(瀟灑園)의 무리지어 서 있는 그곳을 찍어 작품화 한 것이 시발점이다.
그러다 이듬해 영국 런던에 교환교수로 1년 동안 머물게 되는데 한국서 작업했던 정경들이 자꾸 떠올랐다고 했다. “바람 불 때 댓잎이 서걱대는 소리, 대숲 속의 미묘한 향기 등 대나무를 찍어야겠다는 생각보다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한 그런 대숲이 그리웠다. 아마도 그즈음 나의 작업은 이미 형태적으로 선(線)을 추구하지만 궁극의 심미적 탐구는 선(禪·Zen)을 향하고 있었다고 생각 한다”라고 회상했다.
이후 작가는 꽤 오랫동안 마치 대나무의 절개와 정절이 상기되는 듯 한 조형적으로 견고하고 완고한 엄격성이 전달되는 대숲 밖에서 안을 향해 찍은 블랙에 가까운 농회색 이미지작품을 발표했었다. 최근 신작은 대숲 안에서 바깥세상의 빛을 향해서 찍은 작품이다. 그래서 배경이 화이트에 가까운 회색 톤으로 편안하고 마음을 쉬게 해주고 이완시켜주는 부드럽고 미묘한 뉘앙스로 진화하고 있다.
“이전의 현현(玄玄)한 작품들이 대나무가 서로 연대하면서 이끌어내는 원기(元氣)의 노래라면 최근작은 경계를 허물어 확 열어놓음으로써 작은 잎사귀의 개별성에까지 시선이 머무는 자유로운 경쾌함을 전한다. 대숲을 중심에 놓고 안과 밖의 풍경은 이렇듯 사뭇 다르다. 나는 그러한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란 실상 무한히 열려진 신선한 변화의 세계 그러한 우주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대숲은 그러한 메시지를 국내외 관람자와 함께 일깨워가는 소통공간으로서 형이상학적 찰나를 포착한 가장 한국적인식대상 중 하나”라고 밝혔다.
최병관 사진가는 상명대학교 사진영상미디어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번 열다섯 번째 ‘水·竹’개인전은 대나무를 비롯하여 ‘水’작품은 근무하는 학교가 있는 천안의 집근처 새벽정적에 쌓인 조그마한 호수에서 이뤄졌다. 물고기 호흡의 흔적 그 나지막한 물방울이 시원이 되는 수면에 아른거리는 물결을 함께 선보이는데 총 스물한 점을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소재, 갤러리룩스에서 9월1일부터 25일까지 2~3F에서 전시한다.
한편 그는 몇 년 전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소재, 100여년 넘은 고택을 매입하여 수리해 작업실로 꾸몄다. 바다와 산이 있고 훼손이 거의 안 된 깨끗한 자연이 그곳으로 오게 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작업의 영감도 얻고 재충전하여 가끔은 카메라를 메고 나간다. 자연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서 머문다고나 할까. 빈 마음으로 새와 나무와 바람과 그곳 특유의 분위기와 냄새를 깊게 호흡하며 눈물겹도록 살아있음의 감사함을 체감하게 된다. 사진이라는 행위를 보여주기 위한 것에서 욕심을 버리고 즐기도록 이끈 그 자연만이 인간을 품어줄 수 있다는 것의 절대 공감을 일상에서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주간한국 2016년 9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