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신 작가
서울 강남의 오래된 도량(道場). 돌로 쌓아올린 축대(築臺)엔 윤기 나는 햇살을 받은 담쟁이넝쿨이 조금씩 물들어가는 단풍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나무의 군상(CLUSTER)과 인간의 연분을 회화세계에 천착해 온 류영신 작가를 만났다.
꼭 있어야 할 것만 남겨놓고 다 내려놓은 자작과 미루나무…. 최근의 추상적 작품세계는 훌훌 털어 버림으로써 오히려 더 굳세어지고 더 열린 유연한 생동(生動)의 빛깔로 두드러진다. 화면은 나무와 빛이 교감하며 경쾌한 음률처럼 형체(形體)들은 아름답고 리드미컬하게 하느작거린다.
숲속으로-미루나무, 41×64㎝, oil on canvas, 2012
그 갸우뚱거림은, 천천히 흐르는 첼로 선율사이 가벼이 내려놓는 건반의 애절한 눈빛처럼 춤의 간극(間隙)을 연결한다. 그런 때마다 가늘게 호흡이 뿜어져 밤 숲 찬 공기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져가고 알 수 없는 짜릿함이 서로를 잇게 한다.
마치 나무는 풍미 그윽한 여러 종류의 과실주를 손님에게 내놓으며 이상향(理想鄕)에 대해 꾸밈없이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 한 줄기 가을비 지나간 후 따끈한 감잎차 한잔을 들고 자작나무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권할 때 미학적(美學的) 나무들은 한기(寒氣)를 달래줄 것이다.
Cluster, 195×100㎝
그녀는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나무들, 춤의 축제에 초대받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한발씩 숲으로 들어갔다. 날이 어두워진 것인지 숲속은 거대한 의식을 치루는 듯 경건의 아우라가 넘실댔다. 만추(晩秋)의 낙엽이 바스락 거리며 한 시절의 흔적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푸르른 달빛이 정중하게 나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들릴 듯 말듯 한 소나타(sonata) 선율을 따라 붓을 움직였다.”
나직한 설명으로도 이해될 수 없었던 삶의 교차(交叉). 어느 땐가 꼭 만나리라는 확신의 설렘. 나무는 희망과 격려의 언어로 생기(生氣)를 이루어내고 있다. 환원하자면, 마치 군무(群舞)를 펼치는 듯 비구상적인 패턴은 ‘고적한 개체로서의 자아내면’에 반응하는 생명력의 뜨거운 조형언어이다.
Cluster, 65×200㎝
◇환경변화 순응의 有機體
“나무의 생체를 발견하는 놀라움과 강렬함이 나로 하여금 나무에 집착하게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자연과 인간의 하모니는 질서의 원천이고 색채와 형식의 초점이자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흥분되는 회화적 대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첫 개인전 이후 줄곧 나무를 그려 온 것이다.
감정, 의지…. 지속적인 환경변화에 따르는 ‘순응’의 유기체. 자연과 인간의 닮음을 나무를 통해 의미를 투시하고 있는 화면은 신선하다. 나아가 더할 나위 없이 존엄한 인간애를 그려내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은 고상한 자연의 법칙과 다름 아니다.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3년 11월8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