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반본(原始返本)-단지이야기, 52×45㎝ acrylic on canvas, 2011
나른한 사월의 오후가 되면 무료한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뒷동산에 올랐다. 그곳엔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벽엔 진흙으로 토끼며 새를 그린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여름이면 어른들도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모이곤 했는데 안에서는 늘 시원한 기운이 내뿜어져 나왔다.
동굴 앞에는 아주 오래 된 키가 큰 목련 두 그루가 해마다 봄이 오면 탐스러운 꽃망울을 터뜨려 천진난만 아이들은 이 목련나무에 올라가 놀았다. 벌거숭이 개구쟁이들은 나무에 오르기를 좋아했는데 신기하게도 꽃 속에 숨으면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힘차게 약동하는 가지는 아이들의 무게를 적절한 탄력으로 균형을 유지하여 결코 부러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음각으로 파여진 선(線)은 깊게 또는 얕게 혹은 빽빽하고 성글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물 흐르는 듯 하다.
교감, 43×73㎝ mixed media, 2010
새, 꽃, 산, 강물, 주름진 어머니 얼굴
종이와 돌가루를 빻아 한지 위에 붙이거나 페인팅하고 질감을 긁어내기도 한 화면에서 오로지 순진무구, 천상의 아이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노는 어느 봄날 오후의 풍경은 지금의 ‘나’에게 문득 새삼스럽고도 씨익 웃게 만드는 청량제처럼 신선하게 다가온다. “자연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할 때가 인간의 심성이 가장 착해진다는 말이 있다. 자연과 교감을 통해서 선(善)해진다는 것을 나는 존중한다.”(작가노트)
아침이면 참새들이 가지며 나무 아래로 모여들어 한바탕 재잘거리곤 사라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몰랐다. “한밤중에 처연히 빛나는 저 순백의 목련꽃/목련꽃 섬”이 된다는 것을.(서상영 시, 목련꽃) 또한 그 ‘섬’들과 싱싱한 과실들을 주렁주렁 풍성하게 맺는 이웃한 나무들이 새들의 둥지였다는 것도. 그곳은 침묵과 위로와 묵묵한 동행을 하는 행복의 시작, 부부새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새는 마치 소근소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사랑스런 아내에게 다정히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남편처럼 그윽하다.
원신반본(原始返本)-단지이야기, 52×45㎝ acrylic on canvas, 2011
이처럼 작가의 작업들은 거창하지 않고 쉽고 편안하게 전달된다. 소박한 자연관과 한국적 세계관이 강한 그의 화면은 “우리 주변의 꽃과 나무, 동물들에게서 살아 있고 그리고 살아가는 경외심을 놓치지 않는다.”(윤제, 포천아트밸리 예술 감독) 작가가 끌어안은 소중하고 귀한 것을 정성스럽게 보관 하는 것의 모티브(motive)는 바로 ‘단지’다.
오일장을 다녀오신 어머니가 하나씩 건네줄 요량으로 ‘나’ 몰래 사탕 봉지를 숨겨 놓았던 목이 짧고 배가 부른 항아리. 고추지, 오이지, 무말랭이며 첫 추수한 곡식을 작은 단지에 밀봉해 쥐나 해충이 접근하지 못하게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가족의 무사안녕을 위해 어머니가 정한수 올려 기원하기도 했던 그곳.
그는 “친구, 전설, 소중한 추억, 아름다운 자연, 좋은 인연 등을 단지에 담으려 한다”고 말했다. 바로 단지는 그의 의식의 지향점이다. 새뿐만 아니라 꽃이며 산이며 강물이자 우리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다. 꽃을 닮은 순수의 아이들, 뿌리와 근본의 근원자리를 찾아가는 원시반본(原始返本), 단지 속에 편재(偏在)된 내면의 이야기들에서 작가는 ‘자아’를 되돌아보게 하고 무상한 시간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2011년 3월 30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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