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풀이-date 91.0×72.7cm, Acrylic on canvas, 2011
뿌옇게 동이 트는 시간이었다. 비릿하면서도 간간한 내음. 봄바람은 총각 집 앞마당까지 올라왔다. 매화나무 아래 서성이다 애써 꽃을 보고자함은 아니었는데도 한 번씩 고개 들어 보노라면, 무슨 일인지 더는 참지 못한 듯 붉은 알갱이를 드러낸 주먹만한 석류가 가슴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물새들도 어쩐 일로 갯벌을 떠나 무리지어 집 한 바퀴 돌아주고 갔다.
점심 때까지 청산도(靑山島)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아가씨 맘도 다르진 않았다. 읍내서 산 노란 원피스며 굽 높은 구두를 머리맡에 놓고 누워 있었지만 벌써 몇 번씩이나 어제 손질한 단발머리 끝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고 있었다. 아침 해를 세숫물에 안아 씻은 그녀의 볼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교감(交感)이란 이런 것인가!
기억풀이-소식 45.5×53.0cm, Acrylic on canvas, 2011
하늘, 바다, 산 모두가 푸르니 곧 청산 앞바다요, 산과 들 사이 파란 바다 위엔 하얀 버선코 마냥 예쁜 맵시 뽐내며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이미자 노래, 섬마을 선생님)을 흘려 내보내며 통통배 여객선이 입장했다. 초록의 청보리 밭은 뱃고동 소리에 파도치듯 드러누웠다. 반가운 손짓을 해대고 둥그스름한 노란 유채꽃 밭은 살랑살랑 하늘거렸다.
계단식 밭고랑 따라 난 황톳길. 어디선가 “간다간다 내 돌아간다/정든 님 따라서 내가 돌아간다/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진도아리랑, 중)가 들리는 듯 했다. 옹기종기 빨갛고 파란 원색(原色) 지붕들과 골목마다 어우러진 돌담서 바라보는 바다는 어김없는 쪽빛이었다.
드디어 춘풍(春風)남녀가 만났다. 이웃사람들은 ‘섬이 다 훤하다’고 치켜세웠다. 짧은 넥타이 파랑 남방에 빨강바지로 한껏 멋을 부린 총각. 희고 깨끗한 바위틈 잔털제비꽃을 곱게 화분에 옮겨 그녀에게 선물했다. 서로의 멋스러움에 내심 감동하며 그럼에도 표정은 겸연쩍어 먼 시선 하는듯 해도 하, 마음 오가는 끊임없는 대화여. 들떠 있는 마음 어찌 숨기나, 잎도 없이 꽃부터 피는 매화 꽃 세상은 온통 핑크 빛으로 물들었는데.
기억풀이-봄이 오는 소리 45.5×53.0cm, Acrylic on canvas, 2011.
“생선 비늘 같은 바다의 반짝임과 원시림 속 이름 모를 새들이 이곳저곳에서 유희한다. 그곳에서 오는 삶의 풍요로움. 이 청춘남녀처럼 우리들 삶도 늘 설레는 마음으로 살면 얼마나 좋으랴.”(작가노트) 그는 문명의 티없이 자연과 더불어 대화하고 스스로 자연이 되어서 맑은 투명성을 이야기한다. 봄 자체가 설렘이다. 그런데 배를 타고 님 오신다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그림에는 작가가 거쳐 온 삶의 시간과 공간이 압축되어 있다. 하지만 개별자의 은밀한 세계는 이 땅에서 삶을 공유해온 이들에게 보편타당하면서도 온전한 삶의 의미와 해석을 전해준다.”(양건열, 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그는 세련되지 않은 인물과 원시적 자연 풍경을 화면에 끌어들임으로써 너무도 질서정연한 문명에의 스트레스를 단박에 풀어헤친다. 우리들 맘속에 담겨있는 마음의 고향, 잊혀진 연민…. 그것을 아주 묘하게 촌스러움에서 끌어내 웃다가 찔끔거리게 만들곤 한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2011년 4월 13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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