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한국화가 라영 황인혜(HWANG INHEH)|일상의 사랑과 은총 겹의 생명감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10. 16. 16:56

 

The endless love, 72.5×61, 2014

 

 

산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햇살과 구름 한 점 없이 높기만 한 하늘. 잔잔한 바람이 부는가보다. 가늘게 하늘거리는 꽃잎의 춤 하얗게 풀 먹인 삼베옷 같은 구절초.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산언덕 도중 누가 오는지도 모르면서 얼결에 우르르 떼 지어 마중 나왔네. 겹겹 산봉우리 너머의 석양 능청스런 추야장(秋夜長) 민낯이 서로 예의를 갖추고 만나는 오솔길이어라. 자연그대로 갈무리된 그윽한 향()이 저녁안개에 밀려오는데 철부지 꽃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회상(回想)의 합창  

    

 

달빛어린-Moonlight, 120×167.5한지위에 혼합재료, 2013

 

 

목탄오브제흔적사이 흐르는 숨결

작가는 대학시절 국전서예부문에 입선 한 수상경력이 있다. 화에 능통하셨던 부친의 영향이 컸지만 43년여 화업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문인적사유세계의 근간이 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1980년대 초반 정치(精緻)한 필법과 중반시기 시공(視空)’연작에서 풀어낸 대우주의 담론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세월의 원숙한 결이 묻어나는 자연의 온화한 인상과 긴장감을 주는 색()의 대비. 무한한 시간과 무수한 만물들을 껴안은 진폭의 공간으로 열어놓고 있다. 1993년 자음과 모음 그리고 인체, 추상이미지의 운율과 번짐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가나다라연작을 발표한다.

 

한글의 아직 잠재된 감각을 재발견해내는 이른바 문자추상작업은 점면이 만나고 섞이며 원()처럼 순환하고 안과 밖으로 모였다 흩어지며 다시 부상(浮上)한다. 그러한 가운데 생성되는 자유로운 공간은 형형색색의 조형언어로 탄생하고 서로가 서로를 껴안는 혼신의 연대(連帶)를 보여준다.

 

  

   

In the grace, 81×54, 1994

 

 

나뭇잎은 붉게 물들고 한 잎 낙엽 되어 떨어진다. 그제야 열리는 허공의 막막함으로 보이지도 않는 가을바람이 지나간다. 대지는 켜켜이 응축의 신비를 채록(採錄)하느라 여념 없는데, 부스럭거리는 고엽사이 한 여름 열기를 채 녹이지 못한 정염(情炎)의 계곡이 부산스럽다. 맨살의 자백에 먼저 찾아오는 애수(哀愁)의 다른 이름인가, 유한한 생명이여. 만추(晩秋)의 숲에서 생()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게 하는 저, 이미지!

 

 

   

    The endless love, 91×147, 2002

 

 

이후 90년대 후반부터 한지를 꼬아 만든 매듭단추가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 속 더욱 선명히 빛나는 그리움. 여전히 내 마음의 노래로 동행하기를 소망하는 징표. 불현 듯 어느 때든지 홀로 남은 그 순간 조용히 다가와 따뜻한 손 내미는 공감 텔레파시.

 

작가는 소녀시절 어머니가 가르쳐준 매듭 메는 방법은 줄곧 내 의식 속 아름다운 조형세계로 존재해 왔다. 오브제 이상의 어머니와 나를 이어 주고 있는 모성애를 만나는 가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세대(世代) 똑같은 사랑의 지속. 2000년대에 들어와 그지없는 사랑(The Endless Love)’연작이 그것이다.

 

 

    

 가나다라, 60×60, 2002

 

 

 

인연, 그 따스한 눈길의 조우

일상의 여백 같은 그대 복스러운 얼굴의 함박웃음. 수묵, 목탄, 채색, 매듭들이 엮어내는 하모니는 심상의 존엄 그 성스러움을 일깨운다. 당신의 고투(孤鬪)에 무너져 내린 두터운 관념의 벽() 저편 사이 겨울날 처마에 스며드는 따사로운 햇볕같이 그지없는 사랑의 선율이 흐르는데. 그것은 삶을 끈끈하게 이끌어가게 하는 힘. 문득 그런 어느 날의, 수줍은 그러나 유쾌한 몸짓의 당신이 던진 한마디. ()같이 변치 않는 마음이라 했던가!

 

 

 

    

출처=경제매거진 인사이트 코리아(Insight Korea)' 201410월호

=전문위원, 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