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한국화가 김지연|꽃의 떨림 그 사랑과 인생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10. 31. 08:41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45×53cm Mixed Media, 2010

  

 

지금도 확실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강 이쪽과 저쪽을 왕래할 때도, 들을 지나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이 읍내 장터를 갈 때도 이곳에 모여 소식을 나누곤 했다. 오래 된 수양버들은 겨울엔 덩치만 커다란 숭숭 구멍 뚫린 초췌한 몰골로 마치 죽은 듯 서 있었다. 그러나 봄이 오면 앳된 연두색 잎들에 점점 살이 오르고 곱게 땋아 내린 머릿결처럼 자라난 연한 가지들은 간들거리며 세정(世情)을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나무 아래의 선명한 기억은 마을의 어른들이 화전(花煎)놀이를 갔다가 돌아올 즈음, 남자들은 북과 장구, 징을 치며 얼쑤추임새를 힘차게 토했고 어머니들은 손에 손을 잡고 흥에 겨워 마치 한가위 강강술래처럼 둥그렇게 모여 흥을 돋웠다. 그러면 가지들은 강물에 잎이 닿을 듯 휘어져 잎인지 물 위 그림자인지, 하나 되어 출렁일 때 북소리도 춤도 절정에 다다랐던 것이다.

 

진달래꽃 화전 색깔에 넋이 나간 의 이야기에 두견새가 밤 새 울어 피를 토해 붉다는 아버지의 설명 뒤엔 아이에게 별소릴 다 한다며 어머니의 핀잔이 돌아왔다. 어둠이 깔린 들길을 걷다 산 비탈진 밭에 이르면 아버지는 어떤 의식 같은 것을 치르곤 했는데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아버지 그 윗대서부터 일궈온 땅이라며 술잔에 초저녁달을 띄우고 구슬프게 시를 읊었는데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라는 구절에서는 거의 울부짖다 다시 이어가곤 했었다.(이상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44×60cm Mixed Media, 2009

 

     

강변, 모래언덕 위로 늦봄 아지랑이가 눈이 시리도록 그리운 때가 종종 있었지만 청년이 된 그의 어느 하루는 여느 시절과는 완연히 달랐다. 청춘이 꿈꿔 온 지식인의 행보와 자유와 평등의 총화로써 학문은 화염 속에서 빛바래던 시절이었다. 그 때 그는 훨훨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푸름을 보았고 아주 묘하게 청색은 고향의 수양버들 잎 색과 닮아 겹치며 그 속에서 가벼이 하늘거리는 것이었다. “살아 있다면 친구여 바람을 거슬러라/아 바람소리 바람소리 속에/내 몸의 노래가 살아있다”(김지하 시, 바람이 가는 방향)

 

무기력과 자아의 충돌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낙향한 그가 음울한 시간을 보낸 것도 꽤나 오래 된 어느 날, 읍내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그 강가 갈림길에서 맨얼굴의 서글서글한 눈매의 아가씨와 순간 스쳐갔다. 그리고는 야릇하게 느낌으로 젖어왔다. 새벽 방문을 열어놓기가 일쑤였고 그러면 훅 몰려들어 책장을 펄럭이거나 황토벽에 걸린 추리닝을 입고 찬 밤공기 속을 서성이는 상념에 젖게 했던 것이다.

  

 

   

72×60cm Mixed Media, 2010

 

 

마음의 평온을 이끄는 늠름한 바람

정녕 인생은 미완(未完)이런가. 해마다 봄이면 꽃피고 나부끼는가. 한마디 짧은 비명도 없이 스러지는가, 꽃잎은. “초연히 살려 할 적마다/바람에 휩쓸린다. 가차 없이/아예 세상 밖으로 쫓겨나기도.”(황동규 시, 미시령 큰바람) 그렇지만 지금은, 봄비에 모란이 촉촉이 젖어 살랑살랑 흔들린다. ‘마음의 평온으로 가는 길, 이상향(理想鄕) 노래 실어 나르는 저것은 하, 늠름한 바람이어라!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2011512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