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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이영박(LEE YOUNG PARK)|수척한 눈동자에 빛나는 그대영혼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11. 3. 21:03

 

 

 

 

 

강물은 그저 흘러가는 것인 줄 알았었네. 휘어지고 막다른 길을 만난 후 비로소 깨달아요. 꽃잎과 바람이 그리고 낙엽 한 장 만으로도 몸부림치는 사랑을 껴안고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잔물결 이는 강가에서 그대 앞에선 모든 것이 부족하다던 당신. 이별가처럼 휘날리는 억새숲길에서 이제야 그 의미를 깨닫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은백색 꽃들이 상처를 어루만져주어요. 초겨울 비가 사랑의 아리아처럼 보드랍게 내리던 날. 친정을 찾는 새색시 발걸음 마냥 마른 풀 자리는 촉촉이 젖어 갑니다.

 

 

 

 

가브리엘 포레(Gabriel Urbain Faure)꿈꾼 후에(Apres un reve Op.7 No.1 )’ 첼로선율이 온화한 미소로 자연 속으로 스미네. 다정하게 은밀한 속삭임으로 그리하여 천천히 손을 내밀어 뺨에 가볍게 닿을 듯 한 중후한 음색은 불현 듯 북받치는 서러움을 어루만져 줍니다. 만남도 이별도 단 한 줄, 인연의 문장위에 있는 건 아닌지요.

 

 

 

 

기러기 한 쌍이 기럭기럭 긴 여운(餘韻)을 남기며 무심하게 지나간다. 빛나던 청춘의 열망시대는 어느 봄노래처럼 짧고 만선(滿船)의 휘파람을 불며 귀가했던 전성시절을 누가 알까. 노병(老兵)의 전설처럼 상흔(傷痕)으로 패여 삐거덕 삐거덕 반쯤 뭍에 기댄 달콤한 휴식에 졸고 있는 목선(木船) 하나.

 

 

 

 

한 시절, 꽃다운 여인의 달콤한 단잠을 허락했던 투박한 팔뚝에 주름이 일었네. 밀어의 속삭임 그루터기 되었던 저 사랑스런 눈동자 우수에 젖고 파고(波高)를 헤쳐 온 손바닥 굳은살엔 세월의 굵은 흔적이 패어있는데. 환부가 아물며 새살이 돋아나는 새 생명의 순환, 엄숙하여라.

 

 

 

 

바람도 단잠에 빠진 지극히 고요한 수면(水面)에 깃든 붉은 황혼이여. 저기 먼먼 빈 들녘 사이 잔잔히 생()의 물결이 굽이굽이 흐르네. 공허하고 적막만이 흐르는 습지를 지나 가족을 향해 서둘러 산으로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우아하고 나직하게 한마디 던지고 잽싸게 날아갑니다. ‘별리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부유(浮游)하며 날리는 민들레씨앗의 힘찬 움직임을 잊지 마세요.’ 

 

 

 

 

 

광풍의 회오리 빛나는 자의식

 

질풍노도(疾風怒濤)였다. 해안의 절벽을 타고 넘어온 바람과 파도는 윙윙거리며 억새 숲을 단숨에 뒤덮었다. 일시에 쓰러지듯 땅바닥까지 허리가 휘어진 억새들이 한동안 혼이 빠져 드러누웠다가 허연 입김을 푸우 내뿜으며 겨우 하나 둘 씩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낮은 구릉을 넘어서며 그 바람은 더욱 가속이 붙어 밀려들었다. 완강하게 몸부림치며 사력을 다해 온몸으로 막던 나무 문짝은 단지 몇 번 덜컹덜컹 소리를 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와중에, 뿌리 채 뽑힐 듯 좌우상하로 흔들리는 억새들은 필사적으로 축사(畜舍)의 다 허물어진 벽에 은신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혹한의 눈보라에 초록의 풀들도 빈 벌판 속으로 몸을 숨긴지 오래. 한 발만 내딛으면 광풍의 회오리에 휩쓸린다. 그 가운데, 초점을 잃고 공포에 질린 불안의 눈동자가 있었다. 외마디 비명도 소리 지르지 못할 절체절명 위기의 벼랑에 홀로 선 검은 염소 한 마리.

 

누가 그대를 맨몸으로 저 폭풍광야에 홀로 내던져 서 있게 했는지, 말하라. 종아리에 몰려오는 거센 바람 앞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고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건만. 수척한 몸, 아득한 광야(廣野)에서 어디로 가야만하는 것인가.

 

아 파상(破傷)의 순간에 비로써 풀어진, 고삐여. 그때 맨살을 엄습하는 칼바람같이 날카로운 직관(直觀)의 눈빛에 들어오는 오오 한줄기 번쩍이는 섬광(閃光), 자유여!

 

 

   

=권동철 출처=<경제월간지 인사이트코리아(Insight Korea) 2014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