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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 SOON PAL) 서양화가 임순팔| 자연과 정신의 정갈한 연가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11. 3. 10:04

 

 

들길 따라서, 91.0×65.2, oil on canvas, 2010

      

 

빨간, 노란, 하얀 들꽃들은 서로 겨루듯 수직으로 뻗어나갔다. 들길 끝자락엔 무성히 자란 방죽의 풀들이 마치 호위병처럼 까칠하게 통과의례를 치르듯 가는 바람에도 이리저리 늘 과장되게 흔들렸다.

 

그 경사진 풀숲엔 꼬불꼬불 좁은 길이 나 있었는데 거기만 오르면 확 트인 정경이 펼쳐졌다. 화이트 사파이어(sapphire)처럼 영롱한 물빛을 튕기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비 온 뒤 굳어버린 움푹 패인 소달구지 자국 강둑길엔 일찍 학교를 마친 반소매 교복의 아이들 몇이 재잘거리며 귀가하고 있었다.

 

숲은 언제나 각()을 세우진 않았다. 캄캄한 어둠 여름 폭풍우가 몰려올 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길 잃은 새끼 양을 찾아 마을 사람들이 손전등을 들고 맨 먼저 찾아 나선 곳은, 길 다란 방죽 아래 융단처럼 펼쳐진 들풀 숲이었다. 그런 때면 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새끼를 안전히 감싸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곤 했던 것이다.

 

 

   

    들길 따라서, 100×65.2, oil on canvas, 2010

   

 

비가 그치고 물안개가 조금씩 형체도 없는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연극무대가 오르듯 서서히 아침이 그 자리에 점점이 빛을 드리우면 맨 먼저 막 잠에서 깬 뽀송한 얼굴의 꽃들은 이리저리 고개를 치켜들었다. 알록달록 여러 음표가 앙증맞게 매달려 화음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아이의 학예회 발표처럼 키 큰 나무들 아래서 조금씩은 꼼지락거리며 질서 속에서 평화로웠다.

 

이 꽃 이름은 뭐예요?” “, 이건 민들레고 달맞이꽃은 얼마 있으면 피어나지. 이건 접시꽃나무, 요건 잘 모르겠네.” 아빠가 친절하게 대답하는 동안 아이는 벌써 엄지와 검지를 오므렸다 펴며 나비를 좇다말고 나무 아래에 서서 뭔가를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지난 여름 매미를 처음 본 아이는 밤늦도록 누이의 공책에 매미를 그리다 잠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들길 따라서, 182×65.2, oil on canvas, 2010

 

   

그렇게 성장한 소년은 아버지가 늘 육중한 짐을 얹고 장터에 나가는 자전거를 살며시 꺼내 황토가 섞여 울긋불긋한 띠처럼 이어진 긴 강둑길을 미래의 화려한 비상(飛上)을 꿈꾸며 이마에 땀이 흐르는 줄도 모르며 페달을 밟았다. 그런 저녁은 어둠 내린 그 방죽 숲에 홀로앉아 저기 멀리 하나 둘 불 켜지는 마을을 한참 바라보다 늦은 시간 들어가기도 했다. 衆鳥同枝宿(중조동지숙: 뭇 새들 한 가지서 잠을 자고는)/ 天明各自飛(천명각자비: 날 밝자 제각각 날아가누나) <작자미상, 이수광 지봉유설에 나오는 작품>

 

새는, 부산스런 날개 짓이 고별(告別) 인사였던가. 부대끼며 살아 더욱 그리움이 컸을까. 한 마리가, 부비며 자던 가지 초록 잎 푸르른 달빛 내려앉은 야심한 시각 귀환하면 정()은 깊은 밤 훠이훠이 되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거칠 것 없이 독하게 견뎌 솟아오르는 저 들꽃도 그런 밤엔 못내 훌쩍이며 고백록을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201154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