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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이창훈|인생행로 풀어놓은 '새벽풍경 소리'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7. 29. 01:20

 

새벽 풍경소리-상주 보리암, 120×90cm mixed media on  

 

 

하얀 분처럼 살포시 봄눈()이 산을 덮었다. 시샘만일까. 입춘이 지나면서부터 간간히 환하게 열어놓던 하늘은 손길만으로도 축축한 물기가 되는 결정체를 선사했다. 인시(寅時)의 산사. 달도 없는 수묵(水墨)같이 검푸른 새벽하늘은, 아침보다 먼저 봄을 안고 깨어나고 있었다.

 

목탁소리 따라 삼귀의(三歸依) 아픈 고백이 공중을 가르면 산은 부유하며 방황했던 하얀 눈꽃송이들을 기꺼이 맞이했다. 날선 표정으로 나뭇가지 사이 윙윙 오가던 거친 바람은 봉우리에서 눈을 흩뿌렸다. 그러면 놀랍게도 굵고도 튼튼한 산하(山河)의 혈맥들은 더욱 선명해지고 분명 연두색 눈엽(嫩葉)들이 산허리와 계곡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초봄-들꽃, 120×90cm mixed media on canvas, 2011

 

 

산을 보고 들어갔으나 어느새 산은 마음에 와 자리했다. 산을 믿기에 오르고 그곳에서 인생행로 가없는 가벼움과 허물을 풀어놓았다. 계곡 돌 틈 찰랑이는 수면(水面) 위로 차마 버리지 못하고 온 마음의 빛깔이 그리움으로 피어나면 다시 가슴속엔 태산 하나를 쌓았다.

 

산사의 행복은 산에 있는 것인가. 자기를 죽이고 버리고 다시 귀환이 몇 번이었으랴. 어느 날 홀연히 그 발자국 다시 밟으며 가노라면, 산은 를 품었다. “차곡차곡 선을 쌓아나가면서 대상을 구축하고 전경과 후경의 원근을 적극 강조해서 깊이를 부여한 화면은 인적이 부재한 자연풍경 앞에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련한 자취로 만들어 버린다.”(박영택 미술평론가)

 

하얗게 눈 뒤집어 쓴 저어기 석탑을 돌고 돌았던 소망의 발자국들. 두 손 모아 섬긴 꼬불꼬불한 길 같은 주름진 돌 틈 이끼 사이 침묵이란 이름으로 아로새겨진 생과 사의 기록들.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학명선사(鶴鳴禪師), 몽중유(夢中遊) ) 눈이 오고 꽃이 피는 하룻날 찰나(刹那)이런가. 꽃이나 우리 인생도 다를 바 없는 매() 한목숨인 것을.

 

 

 

 

  새벽 풍경소리-구례 화엄사, 53×33.7cm mixed media on canvas, 2011

 

 

기다림은 늘 고요다. 맨 살로 추위를 버텼던 지상의 뿌리들 곁으론 누런 황토가 햇살이 조금씩 서쪽으로 옮겨갈 때마다 슬쩍슬쩍 윤기가 났다. 가야금 현()같이 믿음직한 슬픔을 끊길 듯 이어 아슬아슬 삭풍을 건너온 산은 유려하게 뻗어나간 팔을 부드럽게 감싸 온화한 양지의 터를 생산해 냈다. 노루귀, 할미꽃, 앵초. 겨울이 혹독할수록 봄날 들꽃은 더 아름답고 그 빛 속에서는/꿈도 심장도 모두 꽃망울/ 팽창하는 우주이니”(정현종 시, -꽃망울) 새순의 계절은 진정 참을 수가 없는 것인가.

 

저 산골짝 계곡 물소리 경쾌하고 힘이 넘친다. 봄볕은 얕은 구릉을 비추다 조금씩 아늑한 공간으로 모이고 도저히 더는 겨울잠을 잘 수 없는 보드라운 유혹에 들꽃들이 하나 둘 수군수군 일어났다. 봄은 이렇게 강둑이며 모두를 깨우려다 종종 봄처녀 발등에도 무례하게 기어오르곤 했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2011324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