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9×60.6cm oil on canvas, 2010
냇가의 벤치·꽃 그리고 음악 가슴 콩닥거리던 첫사랑 추억
그러니까 굳이 지난 밤만 뒤척였던 것은 아니다. 딱히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몸이 아니면 정신까지 간혹 약간은 붕 뜬다는 느낌도 있다. 이를테면 밤새 생상스의 ‘백조’ 한곡만을 들었는데도 매번 다른 내용의 편지글이 떠올랐다.
골목길에서 소녀와 마주하며 마른 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선 겨우 잡은 약속 날이 내일이다. 별이 총총한 새벽녘, 밖을 나와 화창한 날씨라고 혼자서 몇 번이나 확신한 것은 또 무슨 증후인지. 누구는 짧다하고 언젠가 갈 것이라고도 했으나 지금은 결 고운 올 블랙 진 바지에 연회색 얇은 카디건을 찰랑거리며 청춘일기(靑春日記)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군데군데 누렇게 색이 변한 오래 된 미술관 벽은 바닥의 잔 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살의 냇물과 어울려 봄이면 따스한 휴식공간인데 꼭 여기서 소녀와 첫 만남을 꿈꿔 왔었다. 미술 전시가 있을 때면 가끔씩 창문으로 음악이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그날은 유키 구라모토의 ‘Lake Louise’ 피아노곡이 봄바람에 가늘게 들릴 듯 말 듯 했다.
행복한 날, 55×38cm oil on canvas, 2010
자신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고 골목을 돌아섰는데 소녀는 와 있었다. 다리를 가볍게 꼬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같은 옷차림의 그녀를 보곤 흠칫 머뭇거리다 의도하지 않았던 옆 벤치로 가서 엉거주춤 앉았다.
작은 황토색 화분에 담은 활짝 핀 제비꽃을 든 채로. 잠시의 침묵 사이로 냇물만 신나게 졸졸졸 흘러만 간다. 물결에 닿을 듯 말 듯 개나리 가지는 아슬아슬 흔들리는데 자꾸만 꽃 속엔 소녀의 미소가 넘실댈 즈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제비꽃, 참 예쁘네!”
아직은 차가운 냇물, 투명한 물살에 비치는 머뭇거리는 뭔가 의미를 담은 눈빛. “소년이 내 목 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세 마리 고기떼를 따라/푸른 물살을 헤엄쳐갔다”(진은영 시, 첫사랑) 사랑은 그렇게 짧은 순간 강렬한 교감으로, 왔다.
부드러운 이미지와 환상적인 느낌
이렇듯 작가는 자유로운 감성과 아름다운 색채감으로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행복한 날’로 번역해 내고 있다. 흡사 파스텔 기법과 같은 미묘한 중간색조의 부드러운 이미지는 실제감을 약화시키는 대신 환상적인 느낌은 과감한 붓 터치와 파격적 구도의 변화 그리고 원색과 회색조의 컬러감을 통해 완성된다. “화면들에는 작가의 일상적 시각과 주변 이야기에 정겹고 공상적인 상념이 묘미 있게 겹쳐 있다.”(이구열, 미술평론가)
행복한 날, 90.9×65.1cm oil on canvas, 2010
며칠 뒤. 소녀가 즐겨 책을 읽는 자그마한 의자 옆에 할미, 패랭이, 미모사 꽃들이 피어난 작은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창문엔 푸르른 창공 아래 고독하게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직 한곳만 바라보다 한꺼번에 쓰러지는 듯한 나뭇잎들. 소녀는 책갈피에 소중히 간직해 온 소년이 건네준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뒷문으로 나가볼래? 나랑 함께 없어져 볼래? 음악처럼”(김행숙 시, 미완성 교향악)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2011년 3월 16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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