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꽃_papaveri, 50×40㎝ oil oncanvas, 2011
고요한 상념 일깨우는 내 마음 속의 ‘블루’
이탈리아 로마 외곽지역 발레스트루치가(街)의 아틀리에. 가끔 한국의 서해바다가 그리우면 서남쪽으로 30여분 자동차를 달렸다. 지중해 오스티아(Ostia) 어항(漁港). 비릿한 내음이 칼칼한 김치처럼 속을 가라앉히곤 했다.
3월 초순의 어느 날 새벽녘. 바닷바람에 흠뻑 취해 해안선을 걷다 돌아와 숙면을 취하고 했던 때완 달리 찬 공기가 창밖을 배회하듯 휘익 휙 무질서하게 들리곤 했다.
깜박 잠이 든 비몽사몽 사이 지축을 울리는 미세한 진동에 반사적으로 창을 열었다.
두두두…. 분명 발굽소리였다. 이어 우우 양떼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아주 가까이서 지나고 있었다. 양(羊)보다 작은 키의 다부진 몇 마리 개들이 그들을 바쁘게 몰고 할아버지 목동은 익숙한 간격으로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게 지나가고서야 비로써 느낀 한기(寒氣). 뜨거운 물에 풍미 넘치는 커피로 몸을 녹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초원의 아침식사를 마친 힘찬 양떼무리들 하얀 물결너머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환희에 찬 얼굴로 이 경이로운 광경을 목도한 화가 이현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바로 이거다!”
양떼 아침을 열다, 70×50㎝ oil on canvas, 2009
초록들녘은 다시 양탄자처럼 펼쳐졌다. 새 한 마리가 후드득 보라는 듯이 솟아오른다. 돌아와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음반을 얹었다. “거룩한 밤이여, 네가 내려와 덮이면 꿈도 너의 달빛처럼 먼 길을 내달아 여기 내려온다.”<슈베르트 가곡, 밤과 꿈(Nacht und Traume) 일부>
모든 물상은 고요하고 상념이 흐른다. 부드러운 멜로디가 애절한 꿈결을 더듬는 간절한 손길처럼 느린 선율로 방안을 적시면 화면에는 어느새 한 무리의 양떼들이 사이좋게 푸르른 호숫가에서 목젖을 적시고 있었다.
눈부시게 밝은 초봄 아침햇살. 물기 머금은 초록의 대지엔 어느새 가득히 양귀비꽃들이 보석처럼 돋아났다. 그러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신 화면의 적(赤)핑크 양귀비꽃들은 감미로운 영상이 되어 손짓했다. “이탈리아를 만나기 전 내 그림들은 어두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에 가능하다고 믿지 못했던 정신의 공간을 발견했다. 거기에 빛이 있었다.”(작가노트)
그곳으로, 162.2×130.3㎝ oil on canvas, 2010
그 빛은 지중해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의 바다, 무채색 수선화와 순한 노랑으로 뒤덮인 유채꽃밭 언덕, 빨갛고 노랗고 눈 덮인 겨울 숲 너머 오렌지색으로 물들어가는 바다너머 회백색 태양으로 탄생했다.
“그녀가 쓰고 있는 강렬한 색상들은 맹렬한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세상 속의 고요함을 일깨워 시야의 범위를 넓게 하고 무한의 세계로 날아오르게 한다.”<이탈리아 일간지 CORRIERE DELLA SERA, Colonnelli Lauretta>
누군가 영원의 언약을 적은 종이배를 시냇물에 띄어 바다만큼 사랑이 불어날 꿈을 꾸었을까. 바다는 순간순간을 각양각색으로 여며 출렁였다. 그러면 언어는 바다 위 하늘에 직각으로 날개를 세우고 떨어지면 죽는 절박한 비행(飛行)을 하는 새에게 생(生)은 아름다운가라고 되묻곤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바다와 새는 서로를 애절히 부르고 낯선 곳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정박이 배의 존재이유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는 20대에 무작정 떠났다.”<마종기 시집, 하늘의 맨살 중>
화가 이현도 그랬다. 그녀만의 바다너머, 블루(blue).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지천명 시간의 흐름 속에 지금 돌아왔다. 지중해 빛을 한 아름 가득안고 환하게 웃으며.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2011년 3월 3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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