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이 떠난 지 열흘 만에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심산(深山) 고찰(古刹)을 모조리 뒤졌지만 끝내 인각사를 찾을 수 없었는데, 우연히 어느 산에 갔더니 신라 때 창건된 낡은 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승려에게 혹시 오래된 비석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 절에 있는 불전루(佛殿樓) 밑에 열 몇 덩이의 깨진 돌이 있는데 혹시 그것이 그것인가요?’하기에, 꺼내어 살펴보았더니 과연 오래된 비석이었습니다. 물로 씻어내고 새겨진 글자를 읽어보았더니 희미하게 ‘인각(麟角)’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습니다.1)”」
가을비 내린 다음날. 풍연(風煙)같은 잔석(殘石)에 새겨진 신비로운 필적(筆跡)처럼 회색구름 사이 아렴풋한 흔적들이 공연히 꿈틀거렸다. 단색화 ‘평면조건(平面條件)’과 불상, 도자기, 장롱 등 우리유물이 그리고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의 물줄기가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법으로 전시장을 감돌았다. 정경화 연주 바흐(BACH)의 바이올린 파르티타(Violin Partita No.2 in D minor, Allemande)가 물새의 긴 행렬을 따라 추우(秋雨)처럼 젖어들었다.
단색화가 최명영(Choi Myoung Young) ‘평면조건(Conditional Planes)’개인전이 9월1일 오픈, 10월11일까지 서울용산구 유엔빌리지3길, 갤러리 비선재(Gallery BISUNJAE) 3개층 전관에서 성황리 전시 중이다. 1970년대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작업변천을 한 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다.
계선(界線)이 없는 사방(四方)의 화면이다. 무한히 열려진 평평한 연속성에 온축(蘊蓄)의 시간이 지는 꽃의 슬픈 노래를 듣고, 정치(精緻)한 필획처럼 삼라만상의 시름을 구구절절 옮겨놓은 여정을 회상한다.
전시장 창가를 가볍게 두드리는, 흐린 하늘에 잠깐씩 비춰지는 찰나의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는다. 만산홍엽(滿山紅葉) 노을이 강물에 출렁이고 졸고 있는 어부가 기댄 펄럭이는 돛에 아로새겨지던 오방색 잎들이 저 허공에 표류하는 듯하다. 불망(不忘)의 당부인가. 문자향(文字香) 피어나는 한 폭 그림 난(蘭)이 말을 건네 온다. 비동시적 동시성, 회통(會通)의 살가움으로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가라하네.
마침내 흡습(吸濕)의 기운 맴도는 고비(古碑)의 봉인이 풀어지면 상처에 절규했던 심상(心象)의 진리가 떠오를까. 이윽고 달이 뜨면 사의(寫意)의 반복자국이 흔들리는 술잔을 귀에 걸고 묘선(描線)의 장단으로 덩실덩실 춤춘다. 근골(筋骨)에서 태동하는 평면의 운율에 나그네 발자국은 질서인 듯 분방(奔放)한데, 호흡이 목숨을 유지하듯 망망 설원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의 수고가 어찌 수행(修行)과 다를 것인가!
◇고졸미 그 사의의 정취
한국적 미학의 풍유(豐裕)로 넘쳐났던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 문인화로부터 암울한 파고를 풍요의 정신으로 건너온 석파 이하응(1820~1898), 운미 민영익(1860~1914)으로 근대미술이 계승된다.
수화 김환기(1913~1974)에게서 홍익대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최명영의 평면탐구는 경문(經文)을 적어가는 지난한 정진처럼 사경화(寫經畵)로 드러난다. 고졸미(古拙美)와 담대한 기운이 응축된 ‘평면조건’작품세계는 저 피안(彼岸)으로 들어가는 걸음처럼 고요하고 조화로운 운치(韻致)의 사상(事象)을 드러낸다. 물과 물이 조우하는 필연의 순환처럼 그러한 사의(寫意)의 정취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환시대미학 한국적회화의 환원
최명영(1941~)미술가는 6.25전쟁 때 황해도해주에서 피난 내려온 세대이다. 전후(戰後) 4.19혁명을 거치면서 청년기미술학도였던 그가 1962년 창립한 오리진(Origin), 70년대 초 한국아방가르드(A.G)를 거쳐 단색화(Dansaekhwa)작가로 50년 외길을 걸어오고 있다.
화가의 일생에 일관되게 관통하는 평면에 대한 인식은 무엇일까. 그에게서 평면은 단순히 선을 얹고 색을 입히는 공간이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갈증과 모색이라는 회화이념을 확보해내는 무대(舞臺)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연하면 평면은 회화의 기폭제이자 마침내 단색(單色)으로 환원(還元)되는 성질의 장(場)인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 정조(正祖,1752~1800)시대 성리학적 이상정치의 관념성을 극복하고자 실학(實學)과 고증학(考證學)이 번성한다. 그때 북학파 초정 박제가(1750~1805)의 제자 추사 김정희(1786~1856)에 의해 조선금석학이 마침내 지식체계의 반열에 올려 진다. 1816년 북한산진흥왕순수비 고증 등 청대(淸代)의 금석학(金石學)을 조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결실이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정신성의 서화동원론(書畵同原論)을 설파했던 추사가 서법(書法) 번뇌로 20년 동안을 헤매고 있다는 고백록이 가을하늘 연무(煙霧)같은 구름사이로 시름없이 흐른다. “만리라 아스라이 석묵 인연 전해 주니(萬里遙傳石墨緣) 백제왕 대궐 기와 감천과 비교하네( 濟王宮瓦賽甘泉) 저 하남의 글자를 수고롭게 찾았으니(褚河南字煩相覓) 대삿갓 나막신은 이십 년을 회상하네(笠屐回思二十年).2)”
우연의 일치일까.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예술과 최명영 단색화 ‘평면조건’은 한국적회화를 꿈꾸고 환원을 실현한 전환시대의 미학에서 탄생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추사는 청대(淸代) 금석학을 조선의 산하(山河)를 몸을 통한 체화(體化)를 통해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물질과 정신화의 융합공간이라는 신구전환의 사조(思潮)가 본령(本領)으로 저변에 흐르고 있는최명영 ‘평면조건’엔 석각(石刻)에 드리운 억겁세월 음영(陰影)처럼 시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省察)적 미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최명영의 작업은…가장 간단한 쓰기와 가장 복잡한 감정의 교차가 잠시 정지하여 일상을 본질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것을 가장 비인간적인 물질과 결합하는 미묘한 경지를 만나게 되며, 이 쓰기의 깨달음은 몸의 드림이 더해져 강력한 현재성이 되었다.3)”
◇정체성, 새로운 패러다임에 서서
최근 ‘키아프 서울(Kiaf Seoul 2022)·프리즈 서울(Frieze Seoul)’공동개최 등 한국미술은 새로운 전기(轉機)의 패러다임에 서 있다. 무엇보다 ‘우리 것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을 더욱 체감하게 되는 시점에서 한국현대미술과 추사 김정희 맥(脈)에 관심을 갖는 필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평면조건’ 화론(畫論)은 시사점이 매우 큰 전시회로 기록될 것이다.
#참고문헌
1)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 1724~1802) ‘제인각사비(題麟角寺碑)’中/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 부러진 기린의 뿔을 찾아서, 이종문 지음, 글 항아리刊.
2)이진수 치간에게 증별하다(贈別李璡秀稚簡), 완당전집(阮堂全集)제10권, 김정희 著/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譯, 1986.
3)김용대-전 대구미술관장 2015.
[글=권동철, 9월5일 2022년,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