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여인 우아한 생의 품격
“이루지 못한 꿈이 얼마나 사무쳐서 새가 나는가. 두루미처럼 목이 길고 깃이 흰 새 한 마리. 구름 뚫고 하늘을 난다 부리에 꽃을 문 채 울음소리 삼키며. 산 넘고 강 건너 외로이 묵묵히 갈 길 간 이의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바치러.<헌화가, 최두석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 지성사 刊>
꽃과 여인의 판타스틱한 색감이 오묘하게 겹겹 번지듯 뒤덮인 화면이다. 그 속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잊혀졌던 ‘내 안의 불꽃들’이 일제히 아우성으로 튕겨 나오려한다. 화면의 목단(牡丹)은 몽환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인물화적 조건을 도드라지게 하는 요소다.
뿌리로 번식하는 홍자, 담홍색의 꽃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조선시대 궁중과 양반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후기에 들어서면 민화소재로서 ‘모란도’는 인기가 컸고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에서도 그 전통과 변용의 생생한 맥박으로 전승되고 있다.
임혜영 작가 ‘Flora(플로라)’를 보노라면 중국 당(唐)나라 화가, 주방(周昉)의 ‘잠화사녀도(簪花仕女圖)’가 묘하게 오버 랩 된다. 우수(憂愁)에 젖은 눈동자와 물결 같이 매끄러운 듯 드러나는 하얀 속살의 귀족 여인. 그녀들 중 머리 위 고혹의 꽃봉오리가 숨을 멈추게 할 듯 농염(濃艷)하게 만개한 꽃이, 목단이다.
◇컨템퍼러리아트 한국의 정신성
“꽃과 풍요의 여신 ‘플로라’를 한국인의 영혼 속 동량(棟樑)이 되는 오방색의 가느다란 선과 매치시켜 모두의 행복한 삶을 기원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작품은 불행을 멀리하고 복(福)을 기원하는 정서가 깊이 새겨져 있다.
동서남북 네 방위(方位)와 흑(黑),백(白),적(赤),청(靑),황(黃) 오방색은 우리 채색화의 뼈대다. 음양오행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한민족일상풍습이 스며있다. 이를테면 불교회화, 민화와 민속뿐만 아니라 패션, 푸드, 스포츠 등 광범위하다. 일제강점으로 한국전통채색화 단절을 우려했었지만 보란 듯이 복원(復元)해 낸다. 끈끈한 생명력의 자기화(personalizing)를 통한 민족저력과 쏙 빼닮았다.
임혜영(ARTIST LIM HAE YOUNG)작품세계 두 테마 ‘Flora(플로라)’와 ‘환생’시리즈는 여인과 새를 중심으로 오방색 선(線)과 목단을 비롯한 꽃들 그리고 신윤복 풍속화를 비롯한 조선후기회화의 부분차용 등으로 변주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조선후기가 한국적인 독창적 화풍(畫風)시대라는 점이다.
임혜영 작가의 회화가 한국정신성의 맥(脈)을 잇는 컨템퍼러리아트(contemporary art)로 조명되는 배경이 된다. 또한 화폭의 새는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의 회상, 조선후기풍속화와 현대미술, 전생과 이생을 연결해 주는 영매(靈媒)로서 늘 여인과 동행하는 존재자이다.
◇엘레강스의 여인 살랑거리는 풀잎
열망과 카오스(chaos)의 불덩이, 로맨틱 한 사랑의 밀어가 꽃향기에 휩싸여 허공에 흩뿌려진다. 잡으려하면 사라지는 허무한 오후의 정념. 그렇게 들끓었던 날, 저무는 황혼에 스카프처럼 나풀거리는 허상을 보며 눈물짓던 방울꽃이 작품 속 몽환적 여인의 아우라에서 불현듯 소환된다.
엘레강스 한 여인의 깊은 표정에서 풋풋했던 시절의 향수가 살랑거리는 바람의 풀잎처럼 나풀거린다.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게 하는 마력…. 여류중견화가 임혜영 회화의 힘이 아닐까!
△글=권동철, 5월26일 2022년, 인사이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