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서사시 그 물빛 이상향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밖으로 나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애써 증명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그 어느 누구도 아님을 깨닫는 길이다.<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지음, 류시화 옮김, 삶의 길 흰구름의 길, 청아출판사刊>”
설렘과 두려운 감정으로 꼬박 밤을 지새웠던 영상처럼 화면은 점점 퍼져나간다. 조금씩 나의 발자국을 덮어가던 눈송이, 새하얗게 두드러진 눈물방울 같은 꽃잎이 허공에서 휘날린다. 흔들리는 나뭇잎, 잔가지들은 마음의 파편과 동무되어 격의 없이 젖어든다.
여명(黎明)은 번져가는 둥그런 원(圓)을 겹겹파장으로 뽐내며 여백의 미덕을 남겨둔 채 또 새날을 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옅은 마티에르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이상향엔 친절하고도 침착한 격려의 힘이 실려 있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Horowitz)’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A장조.’ 기다림을 다스려 온 비감과 오묘의 건반은 아픔과 성숙이라는 이름표를 따뜻하게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저 동굴 암벽에서 배어나오는 물방울의 낙하(落下). 마음 속 깊이 오랫동안 물결처럼 번지며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준 그 청아한 리듬의 번짐. 어둠을 비추는 눈부신 한 줄기 빛에 속살을 드러낸 투명한 물의 노래가 상처 난 영혼의 자국을 위무한다.
“물의 동요는 가라앉을 시간을 필요로 한다. 불순한 것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 깊이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요한 물은 맑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의식적인 자연스러운 마음의 비움을 경험하고 우주 모든 것과의 조화를 깨닫게 된다.<명상과 회화: 서경자(서경자 작가,서경자 화백,SUH KYOUNGJA,徐敬子)/홍가희 미술평론>”
◇다시 피어나는 곱고 선명한 새살
산은 무수히 많은 자국들에 굳은살 등짝을 내어주고 천둥과 비바람으로부터 존재를 보호한다. 산이 품은 바위, 풀잎 속 꼬물대는 미물들, 작은 계곡 옆 은사시나뭇가지의 새 둥지 그 모든 생명들의 갈증을 달래어 주는 깨끗한 물이 졸졸졸 흘러 내려간다.
어디선가 일체의 망상(妄想) 덩어리가 봉우리에 부딪히며 처절한 비명의 메아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진다. 나뭇잎을 스치던 바람은 가는 길을 멈추고 안타까이 제 가슴을 매만진다. 부질없음 위로 다시 피어나는 곱고 선명한 새살….
“돌은 돌의 언어로 말하라. 그러면 산은 너의 말을 듣고 계곡을 내려 올 것이다.<미스트랄의 ‘미레이유’6장, 불의 정신분석·초의 불꽃·대지와 의지의 몽상, 바실라르(G.Bachelard)著, 민희식 譯, 삼성출판사>”
△권동철=인사이트코리아 4월호,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