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정신성의 한국적 기운
1960~70년대 초 한국모노크롬 형성은 이데올로기 대립과 소용돌이치는 냉전의 긴장 속 청년미술학도들에게 던져진 모색과 해법 찾기였다. 그 과정은 가장 한국적정신성의 회화와 민족적 정체성이 잇대어지면서 오리진, 한국아방가르드협회 등 일련의 미술그룹운동으로 표출된다. 이 흐름이 70년대 후반 미니멀아트의 단색화 장(場)을 열게 되는 발판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번 ‘색면추상’전시작의 김기린 화백을 비롯한 송광익, 김근태, 변용국 작가는 연령 차이를 뛰어넘은 모노크롬 계열의 계승이라는 점에 의미가 크다.
김기린(KIM GUI LINE,金麒麟,1936~2021)작가는 1961년 도불(渡佛)하여 일생을 철학적관조의 단색작업을 지속했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빼어났던 그는 ‘안과 밖’,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연작명제가 암시하듯 생명성 가득 찬 우주질서를 비움의 색채에서 찾아가는 수행태도로 일관했다. 그것은 “어쩌면 물질과 정신 사이를 매개하면서 가장 균형 있는 제 모습을 찾으려는 것일지 모른다. 그에게 본질은 ‘열린’것이고 ‘미확정’의 것이며, ‘탈 물질’의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자유로운’것이다.<박신의 미술평론가>”
송광익(SONG KWANG IK,宋光翼,1950~)작가는 한국미술사의 주요전환점이라 할 만한 1960년대 중반 앵포르멜(Informel)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도도히 흐르는 미술변혁흐름 속 한지를 통한 정체성 찾기에 몰두하여 200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지물(紙物)’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한지를 찢고 자르거나 접고 붙이는 등 평면이 아닌 바탕에 세워진다. 다양한 변주를 통한 무수히 반복되는 수행적 행위에서 구축된 3차원 공간의 기하학적 추상화면은 한지물성의 현대성이라는 독창적 방식의 조형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근태(KIM KEUN TAI,金根泰,1953~)작가의 ‘Discussion(담론)’연작은 은유와 절제의, 그곳으로 들어오는 혹 드러나는 마음의 한 줄기가 연극무대 클라이막스(climax) 반전직전의 절대고요와 평온의 무게감을 제공한다. 화면은 겹겹 쌓인 마음의 흐름들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는 듯, 결과 결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바탕으로 생성과 소멸 그 삼라만상(森羅萬象)의 현상학이 스며있다. 하여 그곳엔 “커다란 벽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이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바람소리와 구름한 점에 그 알 수 없는 처지를 벗어나게 한다.<김근태, ‘담론-벽(壁)’ 작가노트>”
변용국(BYUN YONG KOOK,邊用國,1957~)작가의 ‘Red_R.F.I.M’작품은 심연의 기억, 심중에 묻어 둔 깊게 패인 질곡의 흔적처럼 풍상(風霜)에 깎이고 마모된 시간의 자국들이 서 있다. 수많은 상처의 이야기들을 녹여내고 뼈골만 남겨 둔 어떤 행렬은 아름다움 너머 어떤 웅혼한 그리움의 그림자를 기다리듯 따스한 온기의 체온을 숨기고 있다. “오로지 색채와 물감,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화면이 기이한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묘한 원근감을 자극하면서 희한한 깊이와 정신적인 고양을 상승시키는, 다소 신비스럽고 무한함을 안기는, 종교적인 느낌을 자극하는 그런 화면이다.<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한편 이번 통인화랑(TONG-IN Gallery) 5층 ‘색면추상’전(展)은 10월27일 오픈하여 11월28일까지 전시 중이다. 이계선 관장은 “색면으로 구성된 작품은 엄청난 에너지가 화면전체를 압도하고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도발하게 만드는 회화의 순수성이 내재되어있다”라고 전시의미를 부여했다.
부연하자면, 이번전시는 한국현대미술의 1960~70년대 전후세대가 일궈놓은 한국의 토착적 세계관과 역사성이 담보된 한국미니멀리즘의 진화를 한 자리에서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형전시장이거나 많은 작품수가 아니도 충분히 미술사적 서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전시라 하겠다.
△글=권동철 미술전문기자, 이코노믹리뷰 11.4.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