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1978년]A South Korea Sculptor PARK SUK WON,조각가 박석원,朴石元,PARK SUK WON,박석원 작가,한국현대추상조각 선구자 박석원)[박석원 작가의 글]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20. 10. 25. 16:54

핸들 7019, 화강석 브론즈 230×230×45㎝(작품), 80×250×45㎝(좌대), 1970~1985  

 

의 의미성

 

나는 희고 맑은 색을 좋아한다. 그냥 그 담담하고 고운 느낌이 좋은 것이다. 결 없이 자라난 통나무나 무색조의 돌덩어리들, 이를테면 껍데기나 알맹이에 표정이라든지 별다른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재료나 형태를 말한다. 그것들은 항상 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 몸체의 구석구석에 밀착되어 오기를 주문처럼 기대하는 것이다. 해맑은 피부 속을 잔잔하게 흘러 움직거리며 때로는 무한한 힘과 주문처럼 기대하는 것이다.

 

해맑은 피부 속을 잔잔하게 흘러 움직거리며 때로는 무한한 힘과 능력으로 요동하는 미묘한 물결과도 흡사한 내면에의 전이가 좋은 것이다.

 

그 물결의 모습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묻혀서 표정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형식들을 생략하면서 마치 환상과도 같은 수많은 흐름의 흔적을 생성시켜 나가는 일, 다듬어내는 작업들은 관념화된 형과 일차적 재료의 의미를 넘어서서 물질로부터의 형상화된 결과에서 새로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확대해 주는 요소로서, 또는 의 의미성을 비인격화된 인간의 모습과 기계화된 오늘의 실제로부터 구출해 주는 동기로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에 처해 있는 라는 개체를 지켜주고 동시에 생활보다 윤기 있게 빛나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와 같은 돌이라든가 나무라든가 하는 자연물을 나의 표현 소재로 즐겨 다루게 되었고 이 결과는 1974년과 77년에 걸친 두 번의 개인전을 통해서 집약, 정리되고 있지만 이것은 표현에 있어서의 반복과 번식의 형상화라든지, 물질의 실제적인 변용이라는 두 가지 테마를 입체조형의 구체성에로 매개시키려 의도됐던 결과이다.

 

이러한 과정은 내 사고의 폭을 보다 자율적인 모습으로 발전하게 해주었고 이는 유연하고도 투명한 소재의 덕분이며 상당히 진전된 결과를 주었던 것이다. 실상 70년대 이후 A.G라든지 현대조각회 기타 많은 조형 활동을 통해서 다양하게 시도되어 은바 있지만 표현에 있어서의 재료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나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조형성의 확대는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을 떠나서 재료나 물질의 구조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재료에 대한 성향은 나에게 무한한 다사로움과 내면적 변모의 향기를 촉발시켜주고 자연성에의 동화와 전통적 재료에 대한 새로운 정의의 부각이라는 시발점에 서게 해주는 셈이며 재료에 대한 개념의 변혁은 나로 하여금 새 형상에의 가능성을 용이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쌓고 부식시키고 또 쌓고 부식시키는 작업들, 이러한 행위가 반복하는 곳을 따라 형은 한없이 커져 나오는데 이제 나는 그 반대로 칼로 깎거나 정으로 쪼이면서 닦아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아직 정리는 되지 않았으나 넓직한 정원과 작업을 할 수 있는 뒷곁, 그리고 20평 남짓한 건물이 있는 지금의 집으로 옮겨왔다. 자유로운 작업은 물론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작품들을 모아둘 수도 있겠고 그 작품들을 주변에 놓고 늘상 보면서 편하고 자유롭게 다음의 일을 생각해 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생긴 셈이다.

 

이러한 작업공간의 확보는 내가 오랫동안 바라고 꿈꾸어 온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실상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작업은 많은 다른 조각가들이 그러하듯 남의 건물 맨 꼭대기 방이나 강의를 나가는 대학실기실의 구석, 아니면 아파트의 좁은 마루나 야외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거대한 원목을 실어 나르고 둔탁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돌덩어리를 굴려서 움직이게 하는 일이라든지 지독한 소음이 따르는 가공의 작업 현장을 목격하는 건물주의 표정은 모두 다 한 결 같이 굳어지면서 표독하게 일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쫓겨 다닌 작업실만 해도 몇 군데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회상하노라면 지금의 이 장소는 나에게 무한한 안주의 기쁨과 감동을 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아직 정리는 되지 않았으나 넓직한 정원과 작업을 할 수 있는 뒷곁, 그리고 20평 남짓한 건물이 있는 지금의 집으로 옮겨왔다. 자유로운 작업은 물론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작품들을 모아둘 수도 있겠고 그 작품들을 주변에 놓고 늘상 보면서 편하고 자유롭게 다음의 일을 생각해 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생긴 셈이다.

 

이러한 작업공간의 확보는 내가 오랫동안 바라고 꿈꾸어 온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실상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작업은 많은 다른 조각가들이 그러하듯 남의 건물 맨 꼭대기 방이나 강의를 나가는 대학실기실의 구석, 아니면 아파트의 좁은 마루나 야외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거대한 원목을 실어 나르고 둔탁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돌덩어리를 굴려서 움직이게 하는 일이라든지 지독한 소음이 따르는 가공의 작업 현장을 목격하는 건물주의 표정은 모두 다 한 결 같이 굳어지면서 표독하게 일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쫓겨 다닌 작업실만 해도 몇 군데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회상하노라면 지금의 이 장소는 나에게 무한한 안주의 기쁨과 감동을 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75년인가, 구라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무한한 희열의 잔상과 작업에 대한 강렬한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일이 있다. 표면적인 인상이긴 하나 서구인들의 정연한 논리라든지 그네들의 열풍적인 작업 욕구와 생산성을 목전에서 보았고 그들의 고민하는 표정에서 정신적인 깊이를 읽은 것이다.

 

작업을 한다는 사실은 많은 문제를 포옹하고 또 진행시킬 수 있는 첫 단계로서의 의미와 작가로서의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유쾌하게 일하고 끈질기게 추구하려는 자각 현상, 나는 그 작업과 그 세계 속에 한없이 밀착해가고 싶은 것이다.

 

요즈음의 내 작품들 속에는 물리적인 리듬이라든가 변화를 표피에 깔면서 그 이후의 지각 논리를 그 속에서 유발시키려는데 초점을 맞추려 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다시금 나타나는 행태에 그 의미성을 호소하게도 되고 그 형태성 또는 내의성에 접해 있는 외적 요소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든다는 행위와 만들어진 공간성의 의미 이외에 물질과 물질의 상관관계리든지 그 사이를 흐르는 복합된 마음의 소리 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허상-조각공간의 물

리적 내면성으로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오래 동안 허상에 있어서의 구체성의 노출을 내버려둔 이유는 그 허상의 구체성은 끝까지 소유될 수 없는 영원의 현재이며 변화하는 자체성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자체성이라 여겨지는 의미만이 대상을 나의 속에서 참되게 성립시키고 그 존재성을 자유롭게 하며 또한 이것은 자기의 대상성, 논리성을 무형의 내면성이면서도 유형의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해서 이것들을 시각적 느낌 그대로인 겉의 세계와 만나게 하여 완전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려는데 나의 의도를 두는 것이다. 언제나 의문투성이의 세계와 나를 지켜보지만 나는 그 범주에서 얼마만큼이나 높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하는 갈망으로 내 마음은 꽉 차는 것이다.

 

역사의 현실과 간섭이 없는 담백한 자연 공간 속에 우뚝 서서 그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신을 지키고 창조의 뜻을 불태우며 열광하는 일, 그것이 나의(A South Korea Sculptor PARK SUK WON,조각가 박석원,朴石元,PARK SUK WON,한국현대추상조각 선각자 박석원,박석원 작가,한국현대추상조각 선구자 박석원) 길이고 그렇게 늘 생활하고 싶은 것이다.

 

=박석원, 공간(空間) 19783

 

정리=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20.10.13~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