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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22)‥가문의 대들보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9. 2. 25. 20:38

1970년대 말 부인 김인순 여사의 생일날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해랑



이해랑의 자녀에 대한 교육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성격대로 자녀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자녀들에게 은연중에 강조한 것은 언제나 모든 일에 있는 그대로 솔직 담백하고 언제나 진실의 편에서라는 것이었다.

 

그처럼 가정이 화목할 수 있었던 데는 전형적 현모양처인 아내의 보이지 않는 협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해랑의 아내 김인순은 평안도 의주의 지주 장녀로서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본 일이 없는 도쿄 유학 출신의 신여성이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현숙한 아내고 어머니다.

 

특히 유년 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어서 모든 고통을 내면화하고 감내하는 형이었다. 따라서 5남매는 평소 말수가 적고 온화한 모친과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부친의 장점만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5남매 중 장남 이방주, 차남 이민주는 경제학을 공부하여 산업 분야에서 대성했고, 장녀 이명숙과 3남 서양화가 이석주, 막내딸 차녀 이은숙은 예술 분야, 즉 회화와 음악을 공부했다.

 

장남 이방주

장남 이방주는 사실상 이씨 가문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다. 명민하면서도 사리에 밝은 장남 방주는 5남매 중 유소년 시절 가장 고생을 한 경우다. 194310월에 태어났으므로 부친이 연극계를 떠나 무직으로 있을 때다. 세살 때 해방을 맞고 6·25 때 피난지를 오가며 초등학교를 다녔으니 말이다. 전쟁 직후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가정적으로 가장 궁핍한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셈이다.

 

학비만은 부산의 조부가 대주었지만 여타 생활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다. 부친이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그는 모친의 생활고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모친을 이해하고 동정했다. 하지만 연극밖에 모르는, 친구들과 어울려 언제나 밤늦게 귀가하는 부친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연극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이해했다.

 

이방주는 아버지께서는 우리 5남매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엄하신 할아버지 밑에서 고생을 하셔서 그런지 우리들에게는 웬만한 잘못은 눈감아 주시고 훈계조 말씀보다 항상 부드러우신 어조로 고칠 점을 말씀하시곤 하였다라고 회상했다.

 

그의 모친은 가정의 대소사를 남편 대신 그에게 의논할 만큼 장남이자 종손으로서 책임을 도맡았다. 워낙 전통 깊은 가정의 종손이기 때문에 기제사와 치산(治山) 등 대소사가 많지만 그것을 모두 그가 나서서 할 만큼 그는 치밀한 일처리와 책임감이 돋보이는 가정의 기둥 노릇을 했다.

 

방주는 경제학(고려대학교)을 전공으로 택하게 된다. 보수적인 가정의 장남이며 이씨 가문의 종손답게 ROTC를 지망한 그는 육군 중위로 제대하게 된다. 장교 제대와 동시에 현대자동차 공채에 합격한 그는 서울미대 출신의 재원(인진옥)과 결혼하여 두 딸(유영, 상영)을 키우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

 

이방주는 공로와 탁월한 능력으로 부사장 승진 11개월 만인 199812월에 한국 최대 자동차회사인 현대자동차의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올랐다. 전형적인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서는 관료가 아니면 의료인, 예술가를 배출해온 집안에서 한국 굴지의 대기업 사장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던 듯싶다. 이는 순전히 그의 개인적 능력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장녀 이명숙

해방 이듬해(1946년생)에 태어난 장녀 명숙은 일찍부터 그림에 재능을 가진 재원으로서 대단히 조용한 성격이다. 따라서 명문 이화여대에서 생활 미술을 전공하고는 곧바로 결혼했다. 부군(조항록)은 고려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성메리 병원과 보스턴 VA 병원에서 인턴을 했고 현재는 보스턴 텁프트 의대의 임상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중견 의사이다.

 

명숙은 회상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연극만 하시느라고 바쁘셔서 남들 가정적인 아버지들처럼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적었으나 언제나 부드러우셨고 자상함이 많으셨다. 저녁상을 놓고도 식사보다는 술을 드시면서 어머니와 함께 우리 남매들과 화제가 넘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더불어 솔직하고 유머와 위트로 가득 차 항상 재미가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대화를 하시고 기분 좋아 하시는 그때의 아버지가 참 좋았다. 아버지께서 그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왜 연극을 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하시고 싶은 것을 하실 수 있으셨는지…….

 

아버지께서는 연극을 통해서 인생철학을 배우셨던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자기 신뢰! 해야만 된다는 그 꿋꿋함은 나의 삶에 많은 교훈이 되었다.”

 

정리:권동철=2019225일 데일리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