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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23)‥선친에 대한 이해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9. 2. 26. 15:56



모친 김인순의 팔순 잔치에서 세 아들의 모습. 좌로부터 장남 이방주, 차남 이민주, 삼남 서양화가 이석주.



차남 이민주

정부 수립 직후인 194810월에 출생한 2남 이민주는 장남 못지않게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감수성이 풍부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연극인 아버지를 이해했다. 따라서 연세학교 경제학과에 재학 중에는 연극반에 가입하여 공연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는 부친의 뒤를 잇는 연극운동으로 나설까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선친에 대한 추억에서 아버님의 시대는 격동기였다. 일제 식민, 해방, 전쟁, 혁명, 독재, 민주화 등 선진국에서는 수백 년 걸쳐 일어날 변화가 한국에서는 50~60년에 일어났으니 이러한 난세에 자기를 연출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마땅히 취직하여 평범히 살아도 어려웠을 때에 부모님의 반대에도 연극을 택하셨으니 그 고통, 어려움은 대단했고,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이 착박(窄迫)한 문화 풍토에서 연극을 하며 낭만적으로 산다는 것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라고 썼다.

 

매우 솔직 담백하고 민첩하며 직선적인 성격의 이민주는 모친과 닮은 부분인데 실제로 부친보다는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가 연극운동에 대한 꿈을 은근히 비쳤을 때, 모친은 별로 반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연극인에의 꿈을 접고 대학 전공을 살려서 기업으로 방향을 돌린 것도 실은 모친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연세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다나무역에 입사한 그는 1년 반 만에 뛰쳐나와서 스스로 중소기업인 조선무역(朝鮮貿易)을 설립한다. 다나무역의 말단 사원으로 경험을 쌓자마자 독립하여 무역회사를 차린 것이다. 주로 완구(玩具)를 만들어 동남아에 판매하는 조선무역은 승승장구하여 단 5년 만에 수출의 날 대통령표창을 받을 만큼 성장 속도가 빨랐다.

 

민주는 경제 상황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하며 직선적인 성격과 과단성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기업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이 많았다. 그는 또한 효성이 지극하고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모범적 기업인으로 칭송 받고 있다. 부모를 향한 그의 효심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로서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고급차(그랜저)를 출시했을 때 가장 먼저 부친에게 사준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업 수완만 탁월한 것이 아니고 인간관리 면에서도 남보다 앞섰다. 가령 그가 젊은 사업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사업에 눈을 돌린 것이야말로 그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돈을 많이 벌면서도 돈에 애착이 적은 그는 천성이 선량하고 다정다감하며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일찍부터 완구 중에서도 인형에 관심을 가졌었다.

 

서울여자학교 문과 출신의 아내(신인숙)와 세 딸(지영, 은지, 은혜)을 몹시 사랑하는 그는 가족 사랑에 그치지 않고 남의 가정과 아이들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남모르게 도움도 주고 있다.

 

그는 심장이 뛰는 것처럼 만든 곰 인형으로 히트를 해서 큰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선사업이었다. 그는 해마다 거금을 쾌척하여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들의 치료를 도맡곤 했다. 그를 가리켜 주변으로부터 한국중소기업인의 전범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자세 때문이다.

 

3남 이석주

3남 석주는 1952년 즉 6·25 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났지만 그 위의 3남매보다는 고생을 덜하고 자랐다. 즉 그가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가 이미 중진 연극인으로서 막강 여당 공화당(共和黨)의 창당 발기인이었고 교수 겸 예총 회장으로서 문화계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때는 국회의원을 할 때다. 그만큼 그는 명문가 집안의 귀염둥이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남, 차남과는 달리 지나치게 감수성이 예민하여 비교적 방황을 한 편이었다. 이유 없는 반항의 소년이었던 것이다.

 

이해랑은 3남 이석주를 항상 데리고 다닐 만큼 그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방황하는 석주에게 예술 분야, 그중에서도 미술 공부를 권했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석주가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쁜 틈에도 훗날 이석주 작가로서의 성장을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눴으며 자신이 연출한 작품이 오픈 공연을 가질 때는 예술 교육을 위하여 반드시 그와 함께 관람한 후 장시간 기탄없는 토론을 벌이곤 했다.


데일리한국 2019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