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Time’ 연작… 자연속에 녹아든 태고의 뿌리찾기
소한(小寒) 살얼음 계곡 아래로 졸졸졸 물줄기 흐름이 아래, 아래로 흐르네. 하얀 눈이 개울을 덮고 영하의 바람이 눈꽃을 마구 흔들면 윙 위이잉 산은 울었다. 이 혹한의 추위에 저 시냇물은 어쩌면 저리도 평온히 흐를 수 있을까.
편견을 걷어낸 대지가 열어놓은 광활한 포용력. 차고도 깨끗한 물의 역사에 고독한 비행(飛行)에서 돌아 온 새 한 마리가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처럼 퐁퐁 경쾌한 리듬으로 목젖을 적신다. 햇살에 영롱하게 비춰지는 돌에 새겨진 물고기며 어느 아리따운 공주의 연정을 담은 연화(蓮花)며 질서정연한 유영(遊泳)으로 오늘을 기록하는 후예들이 어우러져 하늘을 깨운다.
달이 떠오르면 숲은 푸르른 빛으로 물든다. 축축한 밤공기의 적막을 깨는 삭삭거리는 발소리. 달그림자 두려움도 어찌하지 못할 뜨거운 순정의 길 나서는 긴 목의 한 마리 사슴. “달님이여, 그에게 말해 주소서. 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혹시라도 그가 내 꿈을 꾸고 있다면, 내 생각으로 그가 잠을 깨도록 해 주소서.
오, 달님이여, 부디 사라지지 마소서. 사라지지 마소서!”<드보르작(A. Dvorak), 달에 부치는 노래(Song To The Moon) 중에서> 향기 그윽한 꽃 덩굴에 둥지를 튼 우아한 팔색조 한 마리만이 화급히 눈을 굴리다 사슴의 팽만한 둔부를 삐죽거리며 불만스럽게 훔치고 있다.
몽상적 화면 내적 충만감과 생명력
겨울 들녘은 간간이 흙빛 살결을 드러내 깔깔한 기온을 힘겹게 견디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어느 석공의 간절한 그리움의 징표였을까. 교교히 흐르는 달빛에 오랜 세월 황토색으로 물들어 들녘과 닮아버린 저 홀로의 석탑….
기다림에 지쳤을까. 달빛 훤한 사방이 적요(寂寥)한 시각. 물고기 한 마리가 공중으로 힘껏 솟아올랐다. 그의 순애보를 바라보고 있을까. 날개의 염원도 아랑곳없이 달빛은 짧은 드러냄을 허락했을 뿐이다. 아련한 불씨의 추억, 모닥불의 기억이 생생한 토기(土器)도 달빛에 홀려 공중을 갈랐다.
그릇에 자리를 잡고 단잠에 빠진 새는 어느 날 자시(子時), 날개를 펴지 않고 창공을 날아오른 신화를 기록할 것이다. “그들도 날기 위해 새들처럼 뼈 속을 비웠을까?”<황동규 시, ‘천사와 새’ 중에서>
화면의 토분과 아크릴의 정갈하고 맑고 유려한 느낌의 선과 색채. 이 환상적인 공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럽고 먼먼 시간을 거슬러 알몸으로 만나는 영혼과 저렇듯 제 색깔로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나비와 물에 비친 새털구름이 조화롭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호제 부이오(Roger Bouillot) 씨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조형적 세계는 너무나도 매혹적인 그의 지적 요소들이 이웃해서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다. 우리들은 그 소재들의 조합, 파괴, 재조합이 얼마나 수없이 반복되어진 것인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무위(無爲)로써 다스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버림의 미학. “열린 시간(Open Time)은 비움으로써 시작되고 유년시절의 기억은 그것에 가장 가까이 있음으로써 획득되어졌던 내적 충만감과 생명력의 아름다운 선율”이라는 화백의 회고처럼 침묵으로 이루어지는 묵상과 은총과 섭리에 몸 실으면 물고기가 토기가 날아오르는 푸른 밤의 천진한 신화에 나도 살짝 날아볼 수 있지 않을까!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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