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장생도, 42×160×10cm 한지에 먹, 수간분채, 니금, 2010
상상과 환상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실용적 작품세계
격랑의 파고를 헤치며 전진한다. 꽉 깨문 어금니는 결의에 차 있다. 이제 더 이상 어제의 그들이 아니다. 느림보나 유약한 자가 아니라 비와 거센 바람에 정면으로 맞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불타오르는 눈빛만이 번쩍일 뿐이다.
경쟁자에서 동행자로 결의를 다진 이들이 내건 깃발에는 이런 글귀가 펄럭였다. 독당일면(獨當一面). ‘혼자 한 방면의 중책을 맡다’라는 이 슬로건으로 신묘년 새해를 열고 있는 것이다.
거북이는 물, 토끼는 땅. 바다와 육지를 아우르는 이 둘의 선택은 드라마틱했는데 가장 큰 영향은 생존 때문이었다. 비교우위는 더 이상 의미를 잃고 더 강력한 힘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토끼와 거북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성(知性)의 보고(寶庫)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명언이었다.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상식파괴자, 그레고리 번스 지음, 김정미 옮김)
여러 화가들의 그림들이 프루스트에게 영향을 주었듯 토끼와 거북이 역시 프루스트의 창조적 지성에 영감을 얻어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의식을 깨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거북이의 느림을 저력으로, 왜소한 토끼의 신체를 극복할 수 있는 속도를 결합한 것이다. 거의 동일한 속도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경우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는 경쟁력이 되기 때문이다.
결정 이후 그 둘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이전의 관행들을 과감하게 혁신적으로 해체했다. 그리고 곧 생생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토끼의 명석한 두뇌와 거북이의 급소를 찌르는 끈질긴 분석력을 자신들이 먼저 확인할 정도였으니까.
새해 소망, 34.5×27cm 한지에 먹, 수간분채, 2010
새로운 개념과 철학이 녹아든 화폭
거북이와 토끼가 주인공이 된 민화는 꿈을 그리는 그림이다. 부부의 금슬을 기원하고 다산과 오복을 갈구하며 무병장수를 꿈꾸고 부귀공명을 희망하는 민화를 일컬어 ‘실용적인 그림’이라 하는 대목도 이 시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생활주변 모든 물상을 맘껏 다루고 비현실적 세계의 온갖 상상까지 무한 소재로 삼는 소재의 개방성은 여느 그림과 달리 환상성을 갖는다.”(작가노트)
또 그녀의 전통에서 머물지 않고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도 결코 가볍지 않다. “십장생의 소재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소나무와 거북만을 배치하거나 모란과 소나무만을 분할한 두 폭짜리 십장생도는 그의 진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양회화에서는 꿈꿀 수 없는 장점이다.” (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이렇듯 민화는 내일을 그리면서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고 내일을 꿈꾸면서 오늘을 존재한다. 그 세계는 오늘의 모습이어야 하고, 있어야 할 내일의 모습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참 배움의 바탕들이 어우러져 토끼와 거북이는 앉아서 자료를 보는 것의 평범함에서 떨쳐 일어나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직접 그 패러다임의 물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세계사의 흐름이 단순히 성능 좋은 기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조합하는 새로운 개념과 철학을 누가 먼저 정립하는지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사기의 리더십, 김영수 지음)
오늘은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러 동해 바다로 길을 나섰다. 토끼를 등에 얹고 뻘뻘 땀을 흘리며 각오를 다지는 거북이가 신묘년 새해 아침, 사마천의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의 한 대목을 읊었다.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이라고 하니 토끼가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라고 응수했다. 풀이인즉, 태산은 한 줌의 흙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높은 것이고 강과 바다는 자잘한 물줄기를 가리지 않기에 그렇게 깊은 것이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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