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69×45㎝ 수묵담채 2006
‘남종화 산수’의 세계… 시·서·화 삼절 어울린 개성적 향기 그윽
만추(晩秋)의 안개가 강물 위에 포근하게 안긴 이른 아침. 후드득, 날개깃 하나가 가벼이 흔들리다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새들의 비상(飛上)에 강 물결은 농부의 주름 진 얼굴처럼 오므렸다가 이내 그의 마음처럼 평온하게 수평의 수면을 유지한다. 찰랑이는 소리만 들리는 자욱한 안개 위를 나는 듯, 어망을 건져 올린 풍요를 한가득 싣고 돌아가는 뱃사공. 저 노구(老軀)의 사공은 어떤 꿈을 강물에 띄우고 있기에 저리도 물의 가락에 실려 흐르는가….
목단백화, 162×130㎝ 수묵담채 2008
시·서·화에 고루 능하다
이른 봄 매실나무에는 어김없이 매화의 과실이 열렸다. 스승 몰래 그 신맛에 이끌려 살금살금 나무에 오르다, 낮지만 엄중한 ‘어흠’ 하는 헛기침에 화들짝 놀라 나무에서 떨어졌다. 소년 김천두가 그림공부 하던 고향 전남 장흥 유천재(柳川齋)에서의 추억이다. 그는 매일 일찍 일어나 글을 읽었으며 먹물을 한 대야 갈아 놓고 그것이 떨어질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추사 김정희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난초 그림이야말로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글씨 쓰기로 해야 한다’는 한 구절은 소년에게 단련의 지향이 되었다. “고향의 산수와 그 지역의 당대 유명한 스승들이 많으셔서 배움의 길을 갈 수 있는 환경으로는 더 이상 없었다.”(작가와 대화에서)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그의 그림은 시(詩)·서(書)·화(畵)가 삼박자를 이룬다. 시를 이해하고 음미하면서 작업하기에 그림의 분위기 또한 그런 정취에 녹아든다. 전형적인 남화풍의 산수이면서도 그윽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문인으로서의 격조를 견지하기 때문이리라.”(신항섭 미술평론가)
得粮바다에 해 오르니 水波는 푸르고
照蘇의 석양볕은 서운이 붉구나
日昇得粮水波綠
落照蘇山瑞雲紅
화백은 작품 ‘天冠山’에서 자작시 ‘등천관산유람(登天冠山遊覽)’을 노래하고 있는데 산에서 바라본 득량만의 서정을 읊은 시 중 일부다. 화백은 “가을엔 억새밭이 은빛 물결을 출렁이고 천불, 천탑과 기암괴석 사이로 다도해가 한 폭의 수묵산수화를 펼쳐 보이며 겨울엔 동백꽃이 추운 한겨울을 잊게 한다”고 회상했다.
천관산, 53×45㎝ 수묵담채 2002
마음이 그려져야 고상한 그림
부분, 부분이 실경이면서도 그러나 전체적으로 공상적인 풍경으로 구성되어 있는 화백의 화법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필선(筆線)이다. 서법(書法)의 기본 획을 사물 묘사의 방법으로 전용하고 있는데 점선 따위로 초목이나 산천의 모든 사물을 묘파해 냄으로써 사물에서 매우 박진감 있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는 글씨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가장 개성적인 산수화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지극히 작은 글씨의 조각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그림이 되고 있다. 덩어리를 깨면 글씨의 파편, 그 파편을 모으면 그림이 된다.”(박용숙 미술평론가)
또 작품은 화제(畵題)를 담는다. 고시도 인용하지만 자작시도 적지 않다. “한국화는 고상해야 한다. 손으로 그린 것 같지만 마음이 그려져야 그러한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작가와 대화에서)
리인위미(里仁爲美)라 했던가. 어진 마음이 깃든 곳이면 그 거처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 화백의 산수에 담긴 우리 산하(山河)는 “무덤덤한 그림, 그러한 고상한 그림을 남기고 싶다”는 그의 철학처럼 아름답다. 기교에 빠지는 것을 일생 경계하고 유· 불교의 깊은 사상과 철학의 학업에 정진해 온 그의 산하는 화면에서 고요히 살아난다. 그 강가 실버들 아래 나루터나 노송(老松)이 길을 안내하는 산길 초입에, 봄비에 젖은 모란도….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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