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추억, 몽환적 풍경의 흑백필름-화가 김기태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5. 28. 00:59

 

Unknown Artist, 117×73Oil, Acrylic & Silver Gelatin Print on Canvas, 2010

 

한적하다. 양지바른 산비탈 숨죽인 산마을처럼. 사람이 지나간 듯, 잠시 머문 듯 그러나 흔적 없는 희미한 시골 풍경이다. 마침 추적추적 겨울비가 한 줄기 지나간 황톳길엔 쌀가마니를 가득 실은 트럭이 도회로 황급히 지나가 패인 흙길은 아직 물기로 젖어 있다. 목에다 누렇게 빛바랜 광목 목도리를 두른 운전사는 입 안에서 연신 담배를 이리저리 굴리며 연기를 뿜었으나 시선을 놓지 않고 힘줄이 솟은 굵은 팔뚝으로 핸들을 조정했다.

 

거듭된 덧칠 하나의 결로 삼투되다

 

찰깍찰깍. 프레임 속에 불러들인 피사체(被寫體)는 오로지 과거와 흔적과 존재 대신 부재(不在)를 향할 뿐이다. 사진의 현실과 실제에 대한 존재 증명보다 본질적 국면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낡고 색 바랜 풍경은 아름답고 쓸쓸하고 슬프다. “작가의 작업은 고유의 분위기와 아우라(aura), 사진의 질감을 향한다.”(고충환 미술평론가)

어느 해 여름. 홍수에 떠밀려 내려오다 휘어진 강줄기 얕은 곳에 그대로 머물게 된, 한 때는 초록의 잎으로 무성했던 나뭇가지만이 강물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봄이면 만개한 꽃송이에 어떤 방문객이 왔었는지 묻는 이 없다. 단지 그렇게 몇 덩어리의 숲과 건너편 풍경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강물과 어울릴 뿐. 그렇게 시간에 침식된 것들 위로 수천 수만 은빛 섬광(閃光)이 세월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기형도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Unknown Artist, 145×145Oil, Acrylic & Silver Gelatin Print on Canvas, 2010

 

 

작가는 사진을 직접 찍고, 현상하고, 캔버스에 인화하고,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시제와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사진 이미지들과 회화는 서로 구별되기보다는 하나의 결로 스며들고 삼투된다.”(작가노트)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 빛이 있어야 촬영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만들어 준 환영(幻影)이기도 하다. 고전적 아날로그 흑백필름엔 평범한 일상적 현실을 미묘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감돌게 하는 세계가 스며 있다.

 

나를 눈뜨게 하는 침묵의 서정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의 서정에는 모르는 또는 잊혀진(Unknown 또는 Forgotten) 우리 마음의 물결을 일렁이게 하여 참 나를 눈뜨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 누구의 길도, 강물도 아니면서 그 누구에게도 있을 고향처럼.

 

 

 

Unknown Artist, 53×53Oil, Acrylic & Silver Gelatin Print on Canvas, 2009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 그 존재감이나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 아득하고 아련한 것들을 환기시켜주는 그 이미지들은 마치 비물질적 시간에다가 질료와 형태를 부여해준 것 같은, 비가시적 시간을 가시화한 것 같은 어떤 의외의 지점을 열어놓는다.”(고충환, 미술평론가)

 

황혼이 물들 무렵. 누이와 집으로 향하던 지름길 골짝엔 노란 복수초가 홀로이 쑥스러워하며 피어올랐었다. 메마른 대지에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던 희망의 증거, 그 길을 걷는다. 그리고 목가적인 이 풍부한 서정의 언덕을 넘으면, 분명 강()이 나온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