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수양버들 그늘아래 졸음처럼 여름이 찾아들던 그해였지. 라일락이 나지막한 돌담너머 무상으로 꽃향기를 퍼 날랐다. 답례였을까. 길손 하나 없는 어촌에 찾아든 작열하는 정오의 태양이 슬그머니 비켜서며 말간하늘을 보여줬다.
새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바위언덕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불덩이처럼 눈에 확 들어오는, 오오 고혹에 불타는 저 낯익은 몸짓!
Ⅱ
강둑길은 생각보다 넓었다. 커다란 수레바퀴자국이 꽤 넓은 폭으로 움푹 패여 무거운 짐을 이끌고 간 흔적이 뚜렷했다. 햇살은 거리낌 없이 직선으로 맹렬하게 내려와 정말이지 뜨거웠다. 땡볕 그 자체였는데 그러니 그늘이라곤 하나 없는 둑길을 걷는다는 건 얼마나 용감한 결정이던가.
강둑을 내려서면 모래흙밭들이 둑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강물과 강둑을 연결하는 완충지대였는데 토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는 곳이었다. 그 긴 밭을 사람들은 ‘강둑 밭’이라 불렀는데 거의 대부분 포도밭이었다.
포도나무는 몸통만 두고 줄기들을 좌우로 뻗어나가게 하여 서로 엉킨 듯 수평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멀리서보면 마치 파란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보였는데 한눈에 보아도 수령이 오랜 나무라는 것을 직감케 했다.
저녁이 되면서 조금씩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왕성한 성장을 하는 손바닥 보다 큰 포도 잎들이 춤추듯 꿈틀거렸다. 처음엔 바람이 잎을 흔들었지만 이내 잎들이 바람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듯 가끔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생소했지만 그 소리가 정겹게 다가왔다.
포도나무아래 나지막하고 꽤 길쭉한 원두막은 정말이지 시원했다. 한 여름 밤, 진동하는 포도향기와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맑은 수면에 내 얼굴을 씻는 행복감은 청량한 물의 감촉이 더해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했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아 물을 건져 올려 얼굴에 닿았다. 그렇게 서너 번쯤 했었나? 맑디맑은 물에 비친 포도알들이 창공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 순간, 보였다.
◇서양화가 정정식(CHUNG CHUNG SIK)
화가 정정식(鄭正植)은 홍익대 미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2002 대한민국 미술축전 초대 개인전(예술의 전당)을 비롯하여 가나인사아트센터, 미국 ‘2012 Art Miami’아트페어 독립부스전(展), 중국 상해 문화원, 우림갤러리, 더 케이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11회 가졌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서울오픈아트페어(SOAF), 마니프(MANIF)등 아트페어와 그룹전 300여회 참여했다.
△출처=글-권동철, 원문-월간 리더피아 2015년 6월호. 이코노믹리뷰 2015년 6월5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