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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그 진정한 유산의 가치와 화의-from 서양화가 오재천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5. 7. 23:12

 

청자가 있는 정물 72.7×60oil on canvas.

    

 

실상과 허상극사실적 정물 표현의 전통과 현대 조화

 

맑고 깨끗한 햇살이 창호지 문으로 쏟아진다. 어느새 고요한 안방은 풋풋한 햇과일 향으로 그윽하고 선반 위 제 빛깔들을 뿜는 가을의 결정체들은 보석처럼 생생하다정적이 감도는 방안의 햇살은 이제 더욱 부드러워지고 청자 옆으로 모과며 감이며 포도를 온화하게 감싸고 있다. 오후의 빛은 어머니의 다감한 배려처럼 치우침 없으니 저마다의 존재들이 선명하구나.

 

존재의 넉넉함, 자아의 밑거름

천년 세월 무위(無爲) 속에서 불러낸 고려청자. 영겁의 잠 깨어 햇과실과 어우러지는 저 고아한 자태그를 빚어내고 곁에 뒀던 앞선 세대의 크나큰 성취와 고귀한 넋이 오늘 우리 자손에까지 면면히 후광으로 아름답게 화면에 자리한다.

 

그리고 풍요를 기원했던 복주머니. 누이의 가긍(可矜)한 사연이 묻어 있을 것만 같은 한 마리 오리의 가냘픈 등에 놓인 가지런한 붉은 장신구에선 먼 먼 세월의 자취만이 아련히 묻어 있다.

 

그러나 시간과 시대의 거친 세파를 뛰어넘어 이어온 그들의 존재는 넉넉하다. 손에 넣으면 미끄러질 듯 탱글탱글한 저마다의 햇과일들을 앞세우곤 정작 그들은 저기쯤 물끄러미 물러 앉아 끝없는 자애로움을 건네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무언의 언어가 오늘 우리들 자아성장의 강렬한 밑거름이 아니었더냐!

 

 

 

풍요 162×100oil on canvas.

 

 

 

긴장된 붓질 농염한 색채

빠르게 움직이는 물상의 찰나(刹那). 화면은 작가의 예리한 관찰안을 통해 순간 시점이 포착된 대상들이 생동감으로 넘쳐난다. 꽃이나 과일 따위의 정물은 현실적인 색채로 소상하게 묘사된다그러나 바닥과 배경은 구분 자체를 의식하지 않은 채 완전히 어두운 색채로 통일하거나 안개 상태로 내뿜는 에어브러시(airbrush) 기법을 이용해 청회색의 중성적인 이미지로 표현한다.

 

고운 물감의 입자들이 모여 형성되는 배경은 단지 소재 그 자체만이 선명히 부각되는 형국이다이럼으로써 소재에서 해방된 화면은 넓고 다양한 자연의 세계를 섭렵하고 있다. 정물화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시각 효과, 파격(破格)이다.

 

꽃과 나비와 과일과 도자기 등의 극사실적인 묘사와 구() 형태의 규칙적인 배열. 이 현실적인 소재와 추상적인 이미지는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해 주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이렇게 확장된 조형세계를 신항섭 미술평론가는 추상적인 공간에서 떠오르는 정물은 더욱 농염한 색채 이미지를 발산하며 사실성이 강화된다고 평했다.

 

작가 역시 극사실적 단점인 사진과 비슷하다는 이미지를 확 없애려는 의도였다고 밝혔듯 그의 번득이는 화의(畵意)가 만들어 낸 착상에 긴장된 붓질의 묘사력이 더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양귀비 91×34oil on canvas.

 

 

유산의 숨결, 단감나무의 기억

천도가 넘는 불길을 다스린 후의 얻음. 자연과 인간의 정성이 어우러진 천 년의 이어옴. 그리고 드높은 가을 하늘과 수확의 결실을 물들이는 부신 햇살사실주의라는 전통미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미적 감각에 부응하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작가는 천 년을 이어왔듯 영속성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 튼튼한 버팀목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유는 커지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풍요와 현재 삶의 에너지가 된다라고 작가 노트에 적고 있다.

 

개별적 자연을 각각 고유한 주체로서 의미를 부여해 전통과 현대가 조화되는 오재천 작가의 정중함이 묻어나는 화면우리의 마음을 닦아주는 잔잔한 물결처럼 손때 묻은 진정한 유산의 숨결과 어린시절 친구와 올라갔던 단감나무의 기억들을 떠 올리게 한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