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나의그림 나의생애|서양화가 박기수④, 2000~2003년〕그림이 곧 밥이다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4. 23. 00:05

 

 

노송, 53.0×45.5

 

계룡산 시절 막바지에 남한테 뒤처지는 듯 한 느낌이 있었다. 정보력도 떨어지고 해서 서울의 인사동에서 작업하고픈 심정이 솟아났다. 그래서 2003년 초봄에 계룡산을 시절을 접고 인사동 모 건물 옥탑에 자리를 잡았다. 

 

 

산 속에만 있던 사람이 도심으로 나오니 궁금한 것이 많았다. 골동품에도 심취하고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도 가까이서보며 감상하고 한동안 인사동 거리를 샅샅이 뒤져내듯 다녔다. 그리고 작업을 하다 목이 마르면 인사동 뒷골목 선술집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작가들도 만나고 한동안 회환을 풀며, 산속에서의 고독과 여정을 풀고 한동안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 시절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내 작업실과 가까운 곳의 모 기획사 대표가 찾아와 작품이 좋다고 하면서 그림을 팔아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때 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기분이 좋아 하늘을 날 것 같아 상당량의 작품을 내놓았으나 그림만 가져갔을 뿐 그림 값을 못 받은 적이 있다. 심적으로 좌절감을 맛보았으나 괴로운 마음을 삭히며 묵묵히 작업에 몰두했다.

 

 

 

 

, 65.2×53.0, 2001

 

 

 

그러나 시련은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았다. 작품은 없고 내 호주머니는 빈손인 황망한 상황에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있을 즈음 때 아닌 급보(急報)를 받게 된다. 그 무렵 경제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바닥이었다. 전화도 요금을 못내 끊겨 오는 전화도 내가 연락을 할 수 없을 만큼 궁핍했던 때 인편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자식으로서 효도한번 못해드렸는데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자식 된 도리로서 정말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탄스러웠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내려갔더니 어머니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무덤가에 가서 목 놓아 우는 울음소리만 산골짜기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 53.0×45.5, 2003

 

 

 

 

헐값에 작품을 팔려고도 했으나 문전박대 당하다

그동안 화랑을 돌면서 작품을 헐값에 팔려고도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빵과 바꾸려고 했으나 그렇게 달갑게 받아주지 않아 다시 작품을 들고 돌아설 때의 발걸음 천근만근 보다 더 무거웠다. 한 번은 명절 때 집으로 들어가려고 10호 작품을 가지고 가서 거래하려고 갔는데 그대로 거절하며 내 보낼 때 두 번 다시 이 화랑과 거래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작업실 옆 T식당 주인을 만났는데 가난한 화가인줄 알고 다가와 내 작업실에 놀러 왔다. 내 작품을 둘러보고는 배고프면 막걸리도 마시고 와서 밥도 먹으라고 배려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돈이 없는 형편에 안 먹어도 배부른 것처럼 기뻤다. 그 사장의 덕분으로 그럭저럭 식생활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단양팔경, 53.0×45.5, 2004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공짜로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 무렵 한두 달 더 버티다가 그동안 밥 먹을 것을 그림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인사동을 떠나기 전 어느 날 밤,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밤하늘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좋은 사람도 만났지만 어머니도 잃었고 그림을 가져갔는데 나는 돈을 못 받았고 생활에 필요해 그림을 들고 가 문전박대도 당하는 등 마음의 상처만 잔뜩 안고 멍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크게 얻은 것이 없는 공허함을 안고 인사동 시절을 접고 나는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