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나의그림 나의생애|서양화가 박기수②, 1992~1995년〕산을 가슴에 품고 붓질하다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4. 22. 23:40

 

 

 

월출산, 65.2×53oil on canvas, 1993

 

 

 

지금은 기억이 아련한 어느 해 무더웠던 8월 나는 입산을 결심했다. 아예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설악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밥솥이며 숟가락, 젓가락이며 아내 김숙기(金淑基)여사가 시집올 때 가져 온 이불과 화구(畵具)를 꾸려서 떠났다. 외설악 자락 설악면 시골, 인가(人家)도 한두 채 정도만 있는 산속이었다. 

 

 

홀로 손수 숙식을 해먹으면서 그림만 그렸다. 그림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작업에 열중했다.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면서 작업하다보면 어느새 어둠이 밀려오고 밀려온 어둠이 나중에는 쉰 새벽의 동이 틀 때까지 작업을 했다. 사회와 가정과 모든 사념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그림에 만 몰두하면서 나의 작가 혼()을 불태웠다. 

 

 

그러나 명절이 되면 마음이 무척이나 아파왔다. 아랫마을 외지에 나간 사람들이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고향을 찾아 올 때면 나는 돈이 없어서 집에 가지 못하는 심정은 이루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가족도 보고 싶고 그리움이 넘쳐 나무와 계곡 바윗덩어리를 부여잡고 통곡하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입술을 깨물려 각오를 다시 다졌던 것이다. 

 

 

얼마 후 나는 더 깊은, 아예 민가가 없는 외딴 폐가(廢家)를 찾아 들어갔다. 산의 정취를 더욱 깊이 느끼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이른바 그곳이 나의 제2기 설악산 작품시기이다. 그 무렵은 이미 12월이 가까웠다. 어느 날 이었다. 눈이 펑펑 하염없이 함박눈이 쏟아지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고향생각이 밀려왔다.

 

 

 

 

계룡산, 91.0×72.7cm, 1993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문득 호주머니를 뒤졌다. 소주 한병 값이 나왔다. 나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두 시간을 걸어서 저 아래 마을 가게를 찾아 소주 한 병을 사서 들고 왔다. 향수병(鄕愁病)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소주한 병을 들고 백색(白色)의 세계를 바라보며 혼자 걸어오면서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는가자신에게 수백 번을 되물었다. 그럴 때마다 메아리처럼 답은 하나였다. 더욱 더 내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작품에 정진해야한다는 단단한 각오만이 내 마음의 불을 지폈던 것이다. 

 

 

산 속 겨울 추위는 가혹했다. 사방으로 구멍이 뚫린 폐가는 아무리 막았지만 냉기(冷氣)를 이겨내지 못했다. 차디찬 겨울 동안 그 나무 조각이나 찾아서 미리 준비해 둔 나무로 군불을 때지만 방바닥은 얼음장이었다. 새벽 한 시 가까이 되었는데 난방이 잘 안되어 얼음장 같은 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도 너무 추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 때 라디오에서 안네의 일기가 들려왔다. 세계2차 대전 독일 나치의 유대인 탄압 속에서도 밝게 살아가려는 소녀의 일기가 나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도봉산, 91.0×72.7cm, 1995

 

 

 

산의 기이한 정기(精氣)를 담으려하다

그 이듬해 2월말 쯤 잠시 산을 내려와 서울 인사동 모 갤러리에서 전시신청을 했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와 마무리해서 봄 전시를 했다. 다행히 작품이 꽤 팔렸다. 평소에 만져보지 못한 목돈을 잡아보면서 감격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그 돈으로 물감재료를 사고 아이들 용돈도 주고 책도 사주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시간을 내어 당시 모 신문사를 운영하던 J씨를 만나보고자 했다. J씨는 내가 하산할 때면 빠트리지 않고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면 그는 나의 꺼칠한 모습을 보고 대포 집으로 데려가 술과 밥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이다. 나에게서는 물심양면으로 엄청난 도움을 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마운 J씨이다. 

 

 

한편 나는 전시가 끝나고 다시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그때의 작품은 산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산을 화폭에 녹여 낸 것이다. 남들이 당시 그 작품들을 산에서 기가 흐르고 기운생동 한 느낌이 감동스럽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북한산, 53.0×45.5cm, 1992

 

 

 

나는 산을 가슴에 품지 않으면 붓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나무와 고목나무뿌리, 산새소리와 물소리, 바람소리를 자연의 교향곡처럼 내 마음의 큰 울림으로 다가와 산의 웅혼함과 어머니의 품 속 같이 안온한 그 느낌의 기이한 정기(精氣)를 담으려 했다. 

 

 

산에서는 사람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다행이 조금 떨어진 민가에 혼자 사는 아저씨 한분이 있었다. 그분이 기꺼이 토종닭 한 마리를 잡아 탕을 끓여 산나물과 먹었던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지금도 그 맛의 경지와 그때 그 아저씨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 설악산에서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입학을 한 가장이었다. 나의 책임은 더욱 커져갔다. 나는 짐을 꾸려 계룡산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