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나의그림 나의생애|서양화가 박기수⑤, 2004~2007년〕뜨거운 피로 용솟음친 가슴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4. 23. 00:16

 

 

산이야기, 45.5×53, oil on canvas, 2006

 

 

인사동을 뒤로하고 치악산을 향해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몇 년 동안 생각지도 못한 풍상을 많이 겪은 터라 수도(修道)하는 마음으로 봇짐을 지고 우선 제천의 지인화가에게 갔다. 

 

 

얼마동안 지인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기거를 하고 제천에서 치악산줄기를 따라 올라가며 자리를 잡았다. 치악산 자락 조그마한 2층 빈집을 얻어 작업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치악산을 오르내리며 스케치했다. 보기보다는 차악산은 대단한 악산이었다. 기암절벽과 거친 바위가 솟아나 제대로 전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무,40.9×31.8, 2006

 

 

그래서 나는 새로 온 사람을 잘 받아주지 않는 구나생각하고 계속 도전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그러면서 나는 치악산 정기를 심호흡으로 내 가슴 속 깊이 듬뿍 받아 들이키면서 도시에서 찌든 마음을 훌훌 털어버렸다. 신선한 공기와 풍요로운 마음의 평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 세파 속을 떠나 산 공기는 맑고 시원하였다.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면서 나는 내 몸속의 찌꺼기까지 내뱉었다. 

 

 

가끔 작업을 하다가 힘들면 수채화 작가 J씨와 만나 막걸리 한잔에 작품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면 위안이 되었다. 그는 지역의 지리에 밝아 치악산 곳곳을 안내해 주어 작업에 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었다.

 

 

 

 

산 이야기, 53×65.1, 2007

 

 

 

 

오묘한 풍경의 늦가을 치악산의 절경

치악산은 계곡, 기암바위, 절벽, 고목이 함께 어우러진 늦가을 풍경은 이루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도로 자연의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그 풍경이야말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느 가을날, 나는 산속에서 썩어가는 고목이 불현 듯 눈에 들어왔다 , 인간도 언젠가는 이 고목과 같이 그 번성했던 것을 다 지워버리고 고목처럼 자기 자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준비를 하나보다독백하였다. 그런 때 내 가슴이 뜨거운 피로 울컥 용솟음 쳤다. 그리고 더욱 더 좋은 작품을, 감동 받을 수 있는 작품을 그리자고 내 자신에 다짐하고 다짐했다. 

 

 

한 번은 스케치 도구를 매고 산행을 하였는데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맑았다. 스케치하기 좋은 날이라 여기고 산행을 했다. 오전까지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오전 스케치를 끝내고 휴식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먹구름이 산 주위를 맴돌며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저 멀리 산봉우리 돌 탑 두 개에 번갯불이 번쩍이며 훤한 대낮같이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산을 내려오려고 하는데 이미 소나기가 휘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계곡엔 물이 이곳저곳에서 합류하여 급류가 되어 내려 갈 수가 없었다. 나는 덜컥 두려웠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위로 올라갈려니 비바람이 몰아쳐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던 중 겨우 바위 밑을 발견했다.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 동안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비가 조금 잦아들자 겨우 산을 내려오는데 이리저리 길을 찾다가 나무에 긁히고 바위에 찍혀 온몸이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어두워서야 겨우 산을 내려 왔지만 어둠이 내리고 차는 다니지 않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온 몸에 한기가 엄습해 왔다. 그러다 다행히도 막차를 한참 후에 탈 수 있었는데 그 때 기억만 하면 아직도 몸서리 쳐진다.

 

 

 

 

치악산, 53×45, 2011

 

 

세월은 어느새 2007년으로 내 나이 5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돌아보니 화가로서의 입지도 굳혀야 될 때이고 남들도 나의 작품에 대한 호평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치악산에 들어와 제천시민회관 등에서 개인전을 3회 가졌다. 반응은 좋았으나 작품 판매는 그럭저럭 물감 값을 충당할 정도로 들어 와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인사동 몇 그룹전에도 출품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이도 어느 정도 들어 작가로서 꿈을 다시 펼치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하게 된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