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나의그림 나의 생애|서양화가 박기수①, 1989~1991년〕大地는 나의 첫 캔버스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4. 22. 23:06

 

 

 

 

 관악산, 53.0×41.0㎝, oil on canvas, 1989

  

작품은 작가 자신과 대화이자 동시에 화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일생을 걸어 온 지나간 시간의 애환과 환희의 순간들을 년대기(年代記)로 정리하고 관련 작품을 병행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의미와 다르지 않다. 서양화가 박기수 작가의 구술(口述)을 받아 정리했다. 글의 전개 편의상 ‘나’는 박기수 화백을 지칭한다.

 

 

나는 1949년 지금은 사천시가 되었지만 당시 경남 사천군 정동면에서 출생했다. 고향은 앞과 뒤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안온한 산골마을이었다. 어릴 때부터 뒷동산을 오르내렸다. 봄에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면 새알을 찾아 다녔다. 배가고프면 진달래 꽃잎을 따먹었고 여름이면 시냇가에서 피라미도 잡기도 했다.

 

겨울엔 집 앞마당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지리산에 눈(雪)이 쌓인 것이 보였다. 고향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 아니라서 어린 마음에 가물가물 보이는 그 설경(雪景)이 가슴으로 들어와 끊임없이 바라본 적이 있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며 산골소년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 여섯 일곱 쯤 나이엔 나무를 꺾어 흙 위에 자연의 현상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나의 첫 번째 캔버스는 대지(大地)였던 것이다.

 

1989년 제1회 전시를 서울시 강남의 ‘하나로 화랑(일명, 강남화랑)’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화랑이지만 내 생애 처음 내 영혼의 산물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심경으로 혼신으로 작품에 매달려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 당시엔 변변한 작업실도 없이 산에 가서 스케치하고 집에서 작업했다. 관악산, 도봉산, 북한산 등지를 매주 오르내렸고 전남 월출산 등 전국의 명산을 혼자 배낭을 메고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시절은 산을 발로 찾아다니며 산을 그리겠노라고 다짐한, 내 일생을 바칠 화업(画業)의 작품세계로 받아들였던 시절이었다. 작품을 그리다가 막히면 산을 찾아갔다. 그래서 산은 나의 스승이자 내 작품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관악산, 43.5×38.0cm, 1989

 

무생물에 불어넣는 생명의 붓질

화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작가는 캔버스라는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자이다. 고단하고 외롭고 고독의 존재자이다. 캔버스가 답을 주지 않으면 답답해서 자연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작품을 팔려고 해도 당시엔 경제적으로 큰 보탬이 되지못했다. 당시 그림만 그렸던 나는 작품가격에 대해 무지한면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턱없는 가격으로 작품을 넘기다시피 한 시절이었다. 나에게는 온 몸을 던진 열정의 작품이었지만 무명화가에 대한 작품가격의 대우는 정말 턱없이 낮은 가격이었다. 그러니 언제나 그림자처럼 생활고는 따라 다녔다. 첫 개인전 이후 다음에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무명(無名)의 더 깊은 고행의 첫걸음에 불과했다.

 

 

 도봉산, 53×45.5cm, 1989

 

작업시간도 자는 시간외에는 그림을 그렸다. 산행에서 스케치하는 것 외에는 그림만 그렸다. 하루 12~15시간 강행군했다. 그림 외에는 다른 것을 하지 않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언제 유명해질지도 모르지만 신념하나로 힘찬 붓질을 하며 한걸음 또 한걸음씩 매일 붓을 휘두르며 걸어갔다.

 

그러나 고통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이 무렵 모 일간지에 개인전 기사가 난 것을 보고 부산에서 어느 분이 연락이 와서 서울의 조선호텔에서 만났다. 나에게는 단비와 같은 K씨였다. 사업하시는 분으로 매월 얼마의 돈을 지원할 테니 그림에 전념하라고 했다. 물론 작품으로 답례를 했지만 1년여 가까이 그분과 인연은 이어졌고 약속대로 지원을 해 주셨다. 그 당시 그분이 나의 작품을 알아봐주었다는 것은 빛과 같은, 서광이었다. 많은 용기가 되었고 한 달이면 돈이 기다려졌었다.

 

그런데 그분이 사정이 생겨서 일본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지원이 끊어졌다. 가장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돈이 절실했을 때 그림 작업의 지원을 매달 받아 큰 도움이 됐고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때가 내 나이 40대 초반이었다. 당시 너무 힘든 현실에 나는 온 몸으로 부딪히는

 심경으로 붓질했다. 화면은 더욱 거칠고 더 드세게 전개됐다. 배고픔도 잊은 채,

이 어려움을 한 번 뚫어보고자 하는 심정으로 강한 집념으로 붓을 잡으면

그 몰입의 세계가 나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반추상의 산울림 세계

어떤 때는 작품을 쳐다보면 작품이 아닌 것 같아 찢어버린 작품이 수없이 많았다. 그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져 술을 마셔 위가 상하게 되어 몸을 망가트린 적도 있었다. 열정만큼 작품이 따라주는 않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 점점 손끝으로 그리지 않고 재해석해서 산과 대화를 나누며 깊은 심상의 작업으로 전개해 갔다. 작가마음을 힘차고 거칠게 덧칠하면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갔다. 작품의 산 속에서 사물을 찾으면 보이지 않으나 심상(心象)으로 멀리 보면 산의 울림이 우러나오는 작품이었다. 이 무렵에 나의 작품은 구상이 아닌 반추상적인 작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