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안준섭‥슬픔의 맑음 산다는 것의 여정
「산책자는 막심 뒤 캉의 ‘여행자’에서는 옷을 입는다. “―발길을 멈추는 것이 두렵다. 그것이 내 삶의 본능.……사랑은 나를 너무나 공포에 떨게 만든다. 나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앞으로! 앞으로! 아, 가여운 가난한 자여, 다시 너의 슬픈 길을 걸어가 너의 운명에 따르라!(막심 뒤 캉, 현대의 노래, 파리1855년)”」<도시의 산책자 中,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출판사>
나무와 돌, 대지가 비와 바람과 눈보라를 만나는 내밀한 시간이다. 야릇한 감각의 비감(悲感)이 팽팽하게 맴도는 선율이 장엄하고도 쾌활한 새벽별빛에 뒤섞여 쏟아져 내린다. 존재가 겪는 슬픔 그 말할 수 없는 삶의 회환 위로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튀르 그뤼미오(Arthur Grumiaux)의 명연주 ‘모차르트 바이올린소나타 E단조 K.304’가 입가에 맴도는 한마디 말처럼 흐른다.
“슬픔의 맑음이랄까. 밝은 부분과 애조 띤 부분이 공존하는데 내 감정과 비슷하다.”라고 화가가 토로한 두 악기는 서로의 선율을 제 안으로 받아들이며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나누듯 감정의 융합으로 인도한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안희연 詩,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시인의 시작, 시요일 엮음>
◇스며든 풍경 몸의 기억
화면은 평소에 지나쳤던 길, 꽃, ‘나’를 반기는 나뭇가지의 흔들림, 새와 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표정, 자아(自我)라는 영혼의 리듬이 다채로운 풍경들과 어울려 스미어 있다. 그것은 어떤 색으로, 때론 어두움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크고 작은 색과 면의 덩어리로써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또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고, 큰 의미 일수도 있다. 둥그런 색과 면, 그리운 어떤 이의 모습, 무심한 시간의 흔적인 붓질, 허허로운 들판의 풍경 나아가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나는’ 형식주의자 혹은 낭만주의자일수도 있다. 작품명제 ‘고트호브에서’의 고트호브(Godthåb)는 지구반대편 그린란드의 수도이다. 안 작가가 “예술가의 향수이며 현실에 대한 은유”라고 메모한 뉘앙스가 이 지점 어딘가 서성이는 듯하다.
안준섭 작가는 “나를 규정짓지 않고 무의식까지 뒤적거리며 최대한 열어놓고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고, 너의 모습이기도 하며 세상의 모습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존재와 온전한 의식의 교감을 위하여 보다 심오(深奧)한 원류의 잠재의식까지 담으려 애쓴다. 이를테면 모차르트 레퀴엠, 쇼팽 녹턴 그리고 막스 브루흐 바이올린협주곡 1번 작품26….
그는 저녁 무렵 감미롭게 들이키는 막걸리 한잔 옆 졸리듯 비스듬 누워있는 너절한 표지의 시집 한 문장을 곱씹으며 고독의 시간을 녹여낸다. “그 길이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진실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 그리고 길은 언제나 새롭다.”라고 말하듯 그것은 은밀한 통찰(洞察)의 힘으로 드러난다.
“나의 그림은 오래된 기억과 감정들로부터 출발한다. 체험한 삶, 보고 지나쳐온 아름다운 길,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 내가 보고 느꼈던 감정들과 몸의 기억을 일깨워 표현하려 한다.”
△글=권동철 미술전문위원, 미술칼럼니스트/인사이트코리아 202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