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자연의 운행 질서에 비추어 보면, 나무는 불로 태우면 연기가 위로 올라가고 재는 아래로 잠겨버리는 것과 같다. 신명(神明)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의 근본이고 정기(精氣)는 모든 사물의 몸체다. 그 형체를 온전히 하면 생명력이 넘치고 그 정기를 기르면 성명(性命)이 오래도록 보존된다.”<함양과 체찰, 퇴계 이황(退溪 李滉)-활인심방(活人心方)中, 신창호 엮고 지음, 미다스북스刊>
화면은 견고하게 구축된 형태와 절제된 색채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드라진 선과 한지(韓紙)의 특별함인 반투명성으로 비친다. 종이를 투과한 잔영(殘影)너머 어떤 움직임의 미묘한 아우라는 적절한 표현매체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그림을 그립답게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양사상(Orientalism)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하는 이 밀도 깊은 회화성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한국전통종이인 한지특성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지추상의 서예성과 현대성
박동윤 작가는 1987년 첫 개인전 이후 98년 판화작품에서부터 ‘Affectionate Things(애정이 깃든 사물들)’명제로 연작을 발표했다. 한국인의 감정과 체취, 손길이 머무는 정서를 담은 사물들에 주목한 결실이었다. 초기작에서는 눈에 보여 지는 한국적형상성을 찾았고 점점 한국의 자연, 하늘, 구름, 물, 대지 등을 함의하는 조형의식으로 확장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회화로 회귀, 2007년 화면에 솟아오른 ‘날’작업을 발표함으로써 ‘박동윤회화의 독자성’으로 호평 받았다. 협곡(峽谷)에 퍼지는 억겁의 장엄한 울림을 광막한 대지에 풀어놓은 듯,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고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밭고랑처럼 세워진 한지 선(線)들은 백의민족의 얼을 상기시킨다.
박동윤 화백이 “사물을 물질적 상태의 눈이 아니라 길고 짙은 생각의 눈으로 바라볼 때 보이지 않던 어느 것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라고 토로한 것처럼 작업은 기초단계서부터 회화성을 획득하고 구축해나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 나간다.
먹(墨) 번짐이라든지, 실수로 떨어뜨린 또는 의도하지 않은 자국들이 글씨를 형성하게 되는 우연성으로 풀어낸다. 또 붓 자국을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태극문양이나 오방색뉘앙스의 기운생동으로 표현하는데 색채를 강화시키는 요소로서의 도드라진 선들은 서예성(書藝性)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러한 선은 판화도구인 헤라나 버니셔(burnisher)를 사용하여 한지를 한쪽으로 밀어가면서 일정한 굵기나 형태를 만들도록 의도한 것으로 입체화된 반부조적인 작품 속 획(劃)의 정감과 연동되고 있다.
유장한 강물의 흐름으로 연륜에 덮이고 쌓이는 반복과 순환의 심령들이 화면에 스미어 실린다. 구르는 물방울의 자유로운 그릇이 되어주는 우묵한 연잎처럼 그러한 비움의 겹겹들이 고요한 가운데 움트는 한국의 서정으로 그윽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글=권동철 미술전문위원, 미술칼럼니스트/인사이트코리아 202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