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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26)‥우정과 인연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9. 3. 23. 18:15


  김동원과 함께



이해랑은 50여 년의 연극 인생에서 전반기는 연기자로 살고, 후반기는 연출가로 지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게다가 예술단체총연합회장이라든가 정당인과 국회의원, 예술원 회장 등과 같은 정치, 문화 분야의 높은 직위에 올랐기 때문에 연극과 관계가 적은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연을 갖게 되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인기 배우로, 또 중년에는 이동극장 대표로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공연을 했기 때문에 평생 수십만, 수백만 사람들과 얼굴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사실 가족을 제외하고 연극계 안에서 그와 평생 깊은 인연을 맺고 활동한 사람들을 꼽는다면 아마도 연극 스승인 동시에 선배인 동랑 유치진과 평생의 친구 김동원, 제자 겸 후배인 장민호(張民虎)와 손숙(孫淑), 그리고 극작가 차범석(車凡錫) 및 연출가 임웅(林英雄)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평소 문화계의 술친구로서 자주 만났던 김광주, 유한철,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 곽종원, 조연현 등과 유일한 정치인 김종필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동고동락했던 신협 단원들과 그가 20년 이상 애지중지 가르쳤던 동국대학교 연극과 제자들이 적잖다.

 

동랑 유치진

평생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연극인은 아마도 동랑 유치진일 것이다. 그가 동랑을 만난 것은 도쿄학생예술좌 시절이지만 그의 지도를 받은 것은 1938년 가을(9)이었다. 동랑이 이끌던 극연좌에 그가 정식 가입하면서부터다. 그런데 극연좌가 총독부에 의해서 곧바로 해체되었기 때문에 동랑의 연출 지도를 제로 받지 못하다가 1941년 현대극장 단원으로 가담하면서 본격 지도를 받게 된다.

 

그도 동랑과의 인연과 관련하여 내가 연극 공부를 시작한 것은 도쿄학생 예술좌에 가담하면서부터이지만 그때는 주로 같은 동료 친구들과 같이 일본인들의 연극을 구경하면서 이론 공부를 하였을 뿐 실제로 연극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귀국 후 선생(先生)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다고 술회한 바 있다.

 

즉 그는 자신이 내면적인 리얼리즘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현대극장 공연의 <흑경정>(화니)에서 마리우스 역을 맡아 연출 지도를 받은 데 따른 것이라 고백한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 그가 극협을 조직했을 때 막후 후원자가 동랑이었으며 국립극장 창설과 함께 전속 단체 신협의 연기부장을 그에게 맡긴 사람도 바로 동랑이었다. 그런데 이해랑이 강조한 것은 그런 인연보다도 그에게서 리얼리즘 연기, 연출의 본질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평생의 친구 김동원

그의 평생의 친구 김동원과는 배재고보 시절부터 알고 지낸, 문자 그로 죽마지우다. 그러나 두 사람 간에 친밀해진 것은 1935년 도쿄학생예술좌 때부터다. 한 학년 위던 김동원과는 평생 연극계의 쌍벽처럼 한국 연극을 지켜온 두 기둥이었다.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였던 김동원은 처음 무대에 설 때부터 이해랑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한 회고의 글에서 한 동네에 이진순이 있었고 나중 김동원까지 옮겨 왔다. 도쿄학생예술좌에서 함께 뒹굴며 일했던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동갑네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 우리 짝꿍 중 김동원이 모든 면에서 가장 세련되었고 천성의 무대예술인이었다. 공연 작품마다 예외 없이 주연감이었고 실제 그만큼 빼어난 적격자도 없었다. 평소에는 격의 없는 지우(知友)였으나 일단 무대에 오르면 그는 대선배였고 부러움과 시샘이 엇갈렸다.

 

김동원이 얼마나 멋쟁이였나를 알게 하는 한 가지 에피소드다. <춘향전>에서 과부 역 엑스트라로 소프라노 마금희(馬金喜)가 찬조출연 했었는데 미모에다 미성을 구비한 그녀 역시 당대의 인텔리 신여성이었다. 이들 두 사람이 방학 때 귀국해 어깨를 나란히 본정통(현 충무로)을 활보할 때면 그 멋에 끌린 남녀노소 구경꾼들이 줄지어 뒤따랐다. 금빛구두에 퍼머넌트 헤어스타일의 김동원의 맵시란 한마디로 환상 속의 귀공자였다고 쓴 바 있다.

 

그만큼 김동원은 젊은 시절 친구 이해랑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극협으로부터 신협, 국립극단 등 한국 연극의 큰 줄기에서 마치 친형제나 부부처럼 함께 연극을 했다. 김동원이 언제나 주역이고 이해랑은 조연으로서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을 벌여서 작품의 질을 높이기도 하고 관객을 즐겁게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성격이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좋은 가문 출신답게 정직하고 의연하며 남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않은 신사지만, 술을 좋아하고 적극적인 이해랑과 달리 김동원은 술이 체질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양순한 성격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한국 근대연극사에 있어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명콤비다. 특히 식민지 시대, 해방의 혼란, 분단, 전쟁, 가난 등의 굴곡진 현대사를 헤쳐 오면서 고통을 겪을 때는 언제나 서로 도와왔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의 우정은 남달랐다. 그런 중에서도 적극적인 이해랑 쪽에서 수동적인 김동원을 뒷받침해준 경우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데일리한국 20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