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엄마 기다리는 저녁, 65×53㎝ Mixed Media on Canvas, 2017
(우)저물녘의 산골, 31×38㎝ Mixed Media on Paper, 2016
고즈넉하게 배어있는 시간의 향기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중략)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백석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스타북스 刊>
마당으로 봄날 초저녁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뒷동산 동백이며 산 벚꽃이 수줍음도 없이 만개했다. 낡고 해지고 기울었던 고향집 흙벽에 묻어 있던 적막함과 앞 뒷산 솔수펑이에서 울던 산새들, 어웅한 감청색 하늘에 고슬고슬 떠오르던 별들의 무리가 반짝인다. 에움길을 돌아 걸어가던 언덕이며 동산 위로 남실거리며 돋아 오르던 절편 같은 반달, 새참을 기다리며 목을 길게 뺀 채 종종걸음으로 오는 어머니를 바라보던 뒷밭의 소….
“어린시절이야기다. 3년 전에 춘천호반 인근 50년 넘게 살던 집을 헐었다. 그러다보니 이상하게 기억의 허기가 밀려들었다. 내겐 온갖 추억이 지층처럼 켜켜이 쌓였던 곳이었는데 ‘그리운 것은 가랑비 같이 찾아온다’고 하더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마음의 뿌리까지 스며든 유년이야기들을 그리고 싶어졌다.”
달빛 밝은 밤, 58×68㎝, Oil on Canvas, 2017
◇소박한 이야기 삶의 위안
서울 북촌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인터뷰 내내 조용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대학과 유학시절 말고는 춘천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그는 안개와 호수가 명물인 강원도 춘천시 동면 소양강이 보이는 강변마을에 살며 작업하고 있다.
“줄곧 차가움보다는 따스함, 분노보다는 연민, 슬픔보다는 기쁨, 투쟁보다는 사랑, 불행보다는 행복을 그려왔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상처받고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의 더 없는 치유제가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인데 내 그림들이 힘겨운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면 좋겠고 지치고 가슴에 구멍 뚫린 사람들의 추위와 슬픔을 덮는 이불이 되었으면 고맙겠다.”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중국유학을 했다는 것이 궁금했다. “서양화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100년 되었는데, 천년이상 우리의 전통미술 회화 중에 문인화(文人畵)를 갑작스럽게 내친 것에 대해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안에서 본질만큼은 계승해서 시대에 맞게 다르게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했다. 그래서 기법적으로 무엇을 배우려 했다기보다 정작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은 문인화였었다”라고 했다.
이번 전시작품에도 구도라든가 심원, 고원, 평원 등 이른바 문인화적기법이 반영되고 있는데 자연이 크게 부각되고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작게 표현된 것 등이 그러하다. 그는 장욱진(張旭鎭, 1917∼1990)화백의 작품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동시집에 실린 선생님의 삽화에 이끌려 밤을 새며 보았고 오랫동안 책가방 속에 귀하게 모시고 다녔었다. 그런 기억이 각인되어 단순화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이번작품은 채도 높은 색이 쓰여 졌는데 실제 풍경을 그린것이지만 좀 몽환적인, 현실을 벗어난 색채감이 나오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화가 이광택
이광택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중국 사천미술학원 유화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번 스물여덟 번째 개인전은 5~20호 사이즈가 대부분인 20점을 선보이고 있는데 서울시 종로구 윤보선길, ‘갤러리담’에서 3월31일 오픈하여 4월12일까지 열린다.
“강물을 오랫동안 바라봐서 그런지 슬플 때 가장 아름답고 푸른 물색을 띤다. ‘강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는 속담처럼 깊고 그윽한 곳을 응시하기 위해 고향에 산다고 할까. 긍지와 고뇌, 외로움을 껴안고 세월을 견디는 것이 화가의 길이 아닌가 한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주간한국 2017년 4월5일